비트겐슈타인 규칙과 사적 언어

1.

이 책은 천재 중의 천재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저작인 ‘철학적 탐구(Philosophische Untersuchungen)’의 201단락을 솔 크립키가 해설한 책이다.

좋은 해설에 꼼꼼한 번역 덕분에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거의 불가능한 영역이라 생각해서, 다 읽는데 중점을 두었다. 덕분에 다 읽었다.

2.

크립키의 독창적인 해석은 맬컴(Malcolm), 앤스콤(Anscomb), 베이커(Baker)와 해커(Hacker), 맥긴(Colin Macginn), 보고시안(Paul Boghossian) 등 유명한 비트겐슈타인 연구자치고 이 책에 대하여 논의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 책을 읽고 논의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충분히 똑똑한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3.

당연히 책의 내용은 비트겐슈타인 책 만큼 어렵고, 난해하지만 그래도 천천히 읽으면서 생각하면 솔 크립키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은 이해만 할 수 있고, 비판이 어렵다는 점이지만 일단 이해가 어딘가?!


그렇다면 이것은 회의적 역설이다. 내가 ‘68+57’과 같은 문제에 어떤 방식으로 응답할 때, 내가 왜 다른 답이 아니라 그런 답을 말했는지에 관해선 어떤 정당화도 있을 수 없다. 내가 겹하기를 의미했다고 주장하는 회의주의자에게 답할 수 업기 때문에, 내가 더하기를 의미하는 것과 내가 겹하기를 의미하는 것 사이를 구분해 주는 나에 관한 사실은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새로운 형태의 회의주의를 발명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것을 지금까지 철학사에서 등장했던 것들 중 가장 급진적이며 독창적인 회의적 문제로 간주하고 싶다. 믈론 그는 우리에게 그의 문제를 떠넘기지 않고 그것을 해결하고 싶어 한다.

어떤 원이들이 우리로 하여금 물체의 존재를 믿게 하는가? 하지만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은 헛된 일이다. 물체가 있는가? 없는가? 이 점은 우리가 하는 모든 추론들에서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회의적 역설은 «철학적 탐구»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만일 비트겐슈타인이 옳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건 - 유의미한 평서문은 사실에 대응하게끔 생각해야 한다는 그 자연스러운 전제를 우리가 계속 받아들인다는 조건 - 아래에서는 시작조차 할 수 없다.

[…] 이는 다른 마음이 ‘육체 배후에’ 존재한다는 우리의 ‘믿음’과 그들의 감각이 우리 자신의 것과 비슷하다는 우리의 ‘믿음’을 인식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관련된다.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는 돌, 의자, 탁자 등이 과연 생각하고 느끼는지 정당하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Written on November 25,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