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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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V 철학자’이 지젝.

그의 책은 항상 쉽지 않았다. 수식어로 ‘MTV’가 붙어서 친근해 보이지만 그건 ‘상상계(I)’에 불과했다. 촤헤겔 우마르크스를 손에 쥐고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철학자라 말의 ‘진의’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거기에 대륙의 기상을 온 몸으로 뿜어내는 ‘아우라’를 가진 철학자라 내 입장에선 과도하게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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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해설서를 읽고 기록으로 남기는데, 이마저도 쉽지 않다.

이를 통해서 알게된 가장 소중한 경험은 “어려운 건 어떻게 해도 어려운거고, 쉬운건 대충하면 무지 어렵다”이다.


이 형님, 스타트업 하시면 성공하실 것 같은 마인드이다.

지젝이 자주 인용한 베케트의 한 구절이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이기 때문이다.

마동왕 그랑조가 생각나는건 왜 일까?

‘실재계(R)-상징계(S)-상상계(I)’의 머리글자를 차례로 따서 ‘RSI 삼항조’라고도 부른다.

욕망은 사적인 것이 아니라면 욕망은 어디에서 주입되는 걸까? 욕망도 의존성주입인걸까? 이러한 맥락에서 우린 AOP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욕망은 의미에 무심하고 매우 비인간적인 과정이며, 그것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달콤하게 우리를 조종한다. 욕망은 사적인 것이 아니다. 욕망은 바깥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고통이며, 우리가 비자발적으로 쓸려가는 도착이자 강제적 매개다. 우리는 출생과 더불어 욕망 속으로 내던져진다.”

우린 매트릭스에 안에서 살고 있나 보다. 어딘가 달려가는 토끼를 보면 같이 내달리고 싶어진다.

“현실을 허구로 오인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현실의 어떤 부분이 환상을 통해 ‘기능 변화’되는지, 그래서 그것이 현실의 일부임에도 허구적인 방식으로 지각되는지를 분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 컴파일러는 언제는 배신한다. 그리고 디버거는 뒷통수를 치고, 운영체제는 소리비도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모든것은 나의 ‘실력’ 때문이다. 외부에서 어떤 믿음을 가져오는 것은 ‘기만’이다.

‘역사가 우리 편에 있다’고 믿는 것은 기만이다.

스스로 생각하는게 얼마나 괴로운 일이지 ‘물라 오마르’의 교훈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모르고 사는게 약이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이 악을 더욱더 강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괴롭쟈나?

우리는 무고하고 결백하다는 시선으로 미국은 외부의 악을 응징하고자 하지만, 정작 악은 그러한 시선 자체에도 포함돼 있다는 자각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물라 오마르의 교훈을 다시 되새겨보자. “여러분은 정부가 하는 말을 진실이든 거짓이든 모두 받아들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까?”

그래서 가지비 콜렉터가 중요하다. 상수는 언제나 관리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죽을 운명임을 발견하는 일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불사조임을 발견하는 일이 두려운 것이다.”

어떤걸 선택해도 실패라니… “루비 v.s. 파이썬” 같은 느낌이다.

즉 당신이 지적이라면 정직하지 않을 테고, 정직하다면 지적이지 않을 테다. 그래서? (1).지배 이데올로기를 믿는 정직한 ‘멍청이’거나 (2).그걸 믿는 척하는 똑똑하지만 ‘타락한 냉소주의자’일 거라는 얘기다.

이럴 때 보면 “융”의 상징체계가 가지는 놀라움이 있다.

하지만 지젝이 말하는 요점은 ‘파시즘’을 만들어내는 것은 ‘파시즘’이란 명명 자체이기 때문에, ‘파시즘 이전의 파시즘’이란 속임수이거나 물타기다. 따라서 우리는 집단 퍼포먼스나 신체 단련 같은 것을 ‘원조 파시즘’으로 간주하는 시각을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

자고 일어나면 만들어지는 오픈 소스 프로젝트를 수용하면서 우린 편하게 고생 할 수 있다.

그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건 그렇게 ‘죽음 속에서의 삶’에서 벗어나 삶 자체의 어떤 과잉을 수용하면서부터다.

‘복리/후생’이란건 존재는 하는 거냐?

정치 과정을 번거로운 것으로 간주하고 ‘행정’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탈정치 시대’의 특징이다(우리의 경우로 치면, 이명박 정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하다). 국민이 ‘주권자’가 아니라 복리·후생의 대상으로만 간주되는 것, 그것이 탈정치의 결과다.

20세기 초반에 발명된 민족주의. 얼마나 멍청하게 더 살아야 이 꼴을 안 보나 싶다.

독일인이 베트남인의 길을 가로막으며 괴롭히는 장면을 목격한 것인데, 이 독일인은 신체적 위해는 전혀 가하지 않으면서 단지 베트남인이 가려던 길만 막아섰다. 그리고 베를린 번화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음에도 다른 행인들은 모두 무시하는 척하면서 그냥 지나갔다. 이러한 ‘부드러운’ 괴롭힘이 신나치 스킨헤드들의 잔인한 신체 공격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무사안일주의’가 얼마나 힘든지 세삼 느낀다.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중심적 이념은 ‘무사안일주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핵심 방책이다. 그것이 ‘탈정치’이기도 하다. ‘정치적 해결’ 거리는 남겨놓지 않고 오직 행정 절차의 문제로 모든 문제를 축소하고 환원하는 것이다. 정치란, 거듭 말하지만, 그러한 축소/환원에 대한 반대이고 거부다.

Written on August 3,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