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서양미술사 1

  1. 학문에 대한 입문은 대개 체계론과 학설사로 이루어진다. ‘체계론’은 그 학문이 다루는 문제 영역들을 분류하여 제시하는 공시적 접근이고, ‘학설사’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학문의 변천 과정을 서술하는 통시적 접근이라 할 수 있다.

  2. 리글(Alois Riegl, 1858-1905)의 말대로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솜씨’가 아니라 ‘의지’다.

  3. 중세인은 감각적 물질로 초감각적 세계를 상징하려 했다.

  4. 그런 의미에서 고전주의 미학은 모사의 생생함만 추구하는 자연주의와는 구별된다. 이미 고대에도 자연주의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5. 서구 원근법의 공간은 하나의 등질적인 공간이다. 때문에 화면에 아무리 많은 대상을 집어넣어도 그것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는 경우는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의 시점만 사용하는 선원근법의 장점이다.

  6. 20세기의 추상 예술이 시작되면서 르네상스의 선원근법은 회화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오늘날의 눈에는 외려 러시아의 역원근법이 더 현대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와 여기에 다시 역전이 생기는 듯하다. 디지털 시대는 선원근법을 부활시켰다. 모니터의 평면 위에 3D의 환영을 창줄하는 컴퓨터 그래픽 아티스트들은 수백 년 전에 르네상스의 화가들이 했던 그 일을 반복하고 있다. 다만 이번에는 묘사의 수단이 펜과 붓에서 마우스와 키보드로 바뀌었을 뿐이다.

서양미술사 모더니즘편

  1. 현대예술의 목표가 ‘감성적 쾌감’이 아니라 ‘지성적 충격’을 주는 데 있다면, 그 의도된 효과를 제대로 체험한 이들이야말로 그것의 본질을 제대로 간파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2. 현대회화에는 객과적 해법이 없다. 결국 현대회화가 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과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것이리라. 제들마이어는 이것이 “인간 행위의 근본을 무시”하는 행위라고 본다.

  3. 제들마이어는 이 네가지 규정 속에 담긴 현대예술의 모순과 역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가령, ‘순수성’을 지향하는 현대예술은 의미까지 배제하다가 단순한 비예술로 전락한다. ‘기하학’을 추구하는 흐름은 표현력과 창조력을 잃고 기술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광기’에서 도피처를 찾은 흐름은 예술가를 자동기계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역설적으로 자신이 그토록 반대하던 흐름과 동일한 결과에 도달한다. ‘근원’을 찾아 순결을 회복하려는 시도는 더 큰 순결의 상실로 빠져든다. 의식적 순진성은 그 자체가 이미 가공된 순진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현대예술은 어쩌다가 이런 자가당착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을까?

  4. 야수주의 운동의 요체는 회화의 논리를 전통적 ‘인상론’에서 현대적 ‘표현론’으로 바꾸어놓은 데 있다. 야수주의 이후 화면 위의 이미지는 ‘밖’에는 ‘안’으로 들어오는 인상(im-pression)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표현(ex-pression)으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5. 모리스 드니의 유명한 말은 이 변화의 요체를 잘 보여준다. “그림이란 전투마나 누드나 어떤 일화이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하나의 평평한 면, 즉 어떤 일정한 질서로 구성된 색체로 덮인 면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6. 야수주의는 거의 마티스의 작업과 궤적을 같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룹을 주도한 사람도 마티스였고, 도중에 일탈하지 않고 운동을 끝까지 밀고 나간 사람 역시 마티스였다.

  7. “나는 모든 색깔의 명도를 높여서 내가 느꼈던 모든 것 하나하나를 순수색의 관현악으로 전위시켜놓았다.” 블라맹크의 말에서 드러나듯이, 야수주의 화가들은 재현의 의무에서 색채를 해방시키는 데 관심이 있었다.

  8. 세잔은 인상주의자들까지 여전히 유지했던 원근법이 자연을 실제 우리 눈에 보이는 그대로 보여주지 못한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이것이 내가 보는 것이다.’ 라는 단언을 ‘이것이 내가 보는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대체했다.

  9. 하지만 추상에도 위험을 따른다. 칸딘스키도 이를 안다. “자연과 맺은 유대를 폐기하고… 순수한 색과 독립적 형태를 배합함으로써 만족을 얻으려 한다면, 넥타이나 양탄자 같은 작품을 만들지 모른다.” 물론 칸딘스키는 형식주의자가 아니었다.

  10. 회화가 비재현적 예술이 될 때, 그것은 음악에 가까워진다. 그리하여 칸딘스키에게 회화의 구성(composition)은 곧 음악의 작곡(composition)이나 다름없었다.

  11. 절대주의 회화를 ‘검은 시대’, ‘색채 시대’, ‘하얀 시대’로 분류하곤 한다.

  12. 말레비치에게 “예술은 형과 색의 상호관계나 구성의 아름다움이라는 미적 토대가 아니라, 무게, 속도, 운동의 방향이라는 토대 위에서 구축을 하는 능력”을 의미했다.

  13. 발라의 <가죽 끈에="" 끌려가는="" 강아지의="" 역동성="">은 잔상('관성') 때문에 물체가 중첩('증식')되어 보이는 이미지를 보여준다.(움직임을 묘사하기 위해 신체 부위를 중첩시키는 만화의 기법은 여기서 유래한다.)

  14. 다다이스트들은 ‘익명성’을 위해, 그 누구라도 작품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우연’을 도입했다. 뒤샹 역시 ‘우연’이라는 개념을 사용했지만, 미적 주체성, 즉 작가의 개념을 부정하는 그의 방식은 정착따로 있었다. 그는 그것을 ‘회화적 유명론’이라고 불렀다.

서양미술사 고전 예술편

1.

나에게 있어서 ‘곰브리치’의 미술사보다 좋다. 왜냐하면 1) 시대 분류가 아니기 때문에 머리가 덜 아프고 2) ‘형식 분류’에 대한 기준을 매우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으며 3) 그림을 선택하고 비교하는 안목이 탁월하며 4) 문체가 날카롭고 적당한 리듬이 있기 때문이다.

2.

3권 분량이라서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일단 나에게 있어선 매우 ‘유익한’ 책임에 틀림없다. 최소한 이 책 덕분에 곰브리치에서 말하던 어떤 구절들이 이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곰브리치를 읽었기 때문에 좋은건지, 아니면 이 책이 좋기 때문에 곰브리치가 이해된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곰브리츠보다 보기 좋다는 개인적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1. 비례론의 차이는 곧 양식의 차이를 의미하고, 양식의 차이는 예술의지의 차이를 의미한다.

  2. 비례가 객관적일수록 이미지는 사진에 가까워지고, 구성적일수록 디자인에 가까워진다. 두 비례는 이렇게 서로 배척하는 경향이 있다.

  3. 한마디로 황금분할은 피보나치 수열의 리미트라고 할 수 있다.

  4. 하지만 황금불할이 곧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미는 간다한 수치로 환원될 정도로 간단한 현상이 아니다. […] 게다가 미감은 영원불별하는 절대적 속성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가변적인 상대적 속성이 아닌가.

  5. ‘자유학예’라는 말 속의’ 자유는 생업과 관련된 노동에서 자유롭다는 의미다.

  6. 이미지는 형태와 색채의 두 요소로 이루어진다. 중세 예술의 효과는 역시 강렬한 색채 효과에서 온다.

  7. 알레고리란 본디 ‘다른 것을 말하다’ 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중세인은 우리보다 자연을 한 꺼풀 더 깊숙이 보았다.

  8. “이 세상에 가시적인 방법으로 행해지는 모든 것은 악마의 일일 수도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의 말이다. […] “신에게서 의미 없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그리하여 중세의 장인은 모든 피조물 속에 감추어진 상징적 의미를 찾아 드러내려 했다.

  9. 초월적 층위가 사라지자, 그것을 상징하던 빛나는 재료도 필요 없게 된다. 르네상스의 저자 알베르티는 화가들에게 색과 빛의 효과를 내는데 값비싼 재료 대신에 물감을 사용하라고 권한다. 이로써 사물과 기호는 분리된다. 이미지와 텍스트 역시 분리되어, 화폭에서 쫓겨난 텍스트는 밖으로 나가 제목이 된다. 실제와 환상도 분리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미 장인들에게 “신이 창조하신 질서대로 그려라.”라고 요구한바 있다. 판타지의 여름은 이렇게 저물어갔다.

  10. 카메라는 대상과 주체를 차별하지 않는다. 누가 찍어도, 어느 대상을 찍어도 늘 정확한 재현을 제공한다. 그런 의미에서 카메라의 시각은 보편적이며 객관적이다.

  11. “소묘가 올바르게 되었다면, 그것 하나만 가지고도 썩 잘 된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12. 화폭의 안은 철저히 가상이어야 하기에, 금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화폭 밖으로 나가 장식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중세의 관념은 뒤집어진다. 중세 예술의 가치는 주로 사용된 재료에서 나왔다면, 르네상스 예술의 가치는 예술가의 솜씨에서 나온다.

  13. 이미 유클리드는 사물의 길이가 떄로 거리보다 각도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지적한 유클리드의 «광학» 제8정리는 르네상스의 저자들에게 무시되거나, 또는 전혀 다른 뜻으로 변역되곤 했다. 파노프스키는 이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마치 고대 피타고라스 교단에서 자신들의 체계를 보존하기 위해 무리수를 발견한 이를 우물에 빠뜨려 살해한 것처럼, 르네상스의 저자들은 자신들이 애써 세운 재현의 체계를 일거에 무너뜨릴 수 있는 이 사실을 애써 묻어두려고 했다는 이야기다.

  14. […] 그 균열을 가리지 않과 과감하게 드러내려 했을 때 바료 큐비즘이 탄생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15. 하지만 거기에는 러시아 역원근법의 요소 역시 작용하고 있음을 놓치면 안 된다. 왜? 우리가 컴퓨터 모니터 위에서 보는 3차원 공간의 환영을 관찰자가 가상의 공간 안에서 움직일 때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운동지각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점을 도입하여 움직이는 지각을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러시아 원근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컴퓨터 그래픽은 두 개의 원근법 체계의 종합인지도 모른다.

  16. 그림의 경우도 다르지 않아, 의미를 해독할 때 우리는 위에서 말한 세 단게의 절차를 밝게 된다. 다시 말하면 먼저 ‘일차적, 자연적 의미’를 읽는 전 도상학적 단게에서 시작하여, ‘이차적, 관습적 의미’를 읽는 도상학적 단게를 거쳐, 그가 그림의 ‘숨은 내실’이라고 부른 ‘본래적 의미’를 읽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다.

  17. 파울 클레가 말한 대로, 현대 예술의 과제는 가시적인 것의 재현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화’에 있다고 하지 않던가.

Written on January 20,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