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1. 소나무 검푸른 그림자가, 바람 따라, 성에 낀 유리창에 흰 살을 부드럽고 난폭하게 쓰다듬고 있는.

  2. […] 이적요 시인이 남긴 마지막 문장에 뭐랄까, 차가운 폭력성이 담겨 있었다. 관능은 시간을 이기는 칼이며,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누군가의 죽음을 부른다는 것, 신생의 폭설 같은.

  3. 욕망이라면, 목이라도 베이고 싶은, 저돌적인 욕망이었다.

  4. […] 니체가 말한바 ‘낙타의 시기’가 그에겐 영원했고, 따라서 자기반역을 통해 세계를 독자적으로 이해하는 ‘사자의 시기’는 그에게 도래하지 않았다.

  5. […] 나를 찾아올 때 그는 이미 출구 없는 미로에 갇힌 상태였다.

  6. 가령 네게 연필은 연필이지만 마음 놓고 공부할 환경을 살지 못했던 내게 연필은 눈물이다.

  7. 오늘은 은교, 네게 첫 편지를 쓴다. 지금은 부치지 않을 편지를. 그래도 편지, 하고 발음하고 나니까 사탕을 물었을 때처럼 혀끝이 달콤하다.

  8. 친구가 되고 애인이 되는 데 나이는 본원적으로 아무 장애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나의 열입곱과 너의 열입곱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면 그것이겠지.

  9. 그 무참한 기억의 편차 같은 것.

  10. 섹스는 자연이라고 나는 믿었다. 그것은 본래 자연이 만든 순환의 한 과정에 불과하다. 특히 남자들에게 섹스는 환상이 아니라 현실 문제이다. 여자들이 종종 섹스를 통해 환상에 근접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남자들은 섹스를 통해 환상을 현실로 만든다.

  11. 설령 은교를 품는다고 해도, 젊은 그애의 몸속에 내 몸을 파죽지세 박아넣는다 해도, 그것으로 내가 무엇을 이루겠는가. 그애는 ‘구멍’을 내 줄 뿐이고 나는 어두운 ‘구멍’을 잠시 얻을 뿐이다.

  12. 삶이란 시대의 환경을 반영하면서 쌓이는 게 아니겠는가.

  13. 모든 소설이 그의 경우, 미완으로 서랍 속에 수감됐다.

  14. 이적요 시인이 본 경이로운 아름다움이란 은교로부터 나오는 특별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단지 젊음이 내쏘는 광채였던 것이다. 소녀는 ‘빛’이고, 시인은 늙었으니 ‘그림자’였다. 단지 그게 전부였다.

  15. 여성에 있어 연애는 영혼으로부터 감각으로 옮겨가는지 모르지만, 남자에게 연애는 감각으로부터 영혼으로 옮겨간다.

  16.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은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17.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에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것은 혈연에 따른 의무와 권리로 사람의 관계를 묶어두려는 일종의 정치적인 속임수라고 까지 생각했다.

Written on January 1,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