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문화 비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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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북스에서 책을 사서 읽었는데, 책 편집이 거의 절망이다. 본문 중복은 기본이고 각주 중복도 나온다. 메일을 보냈는데, 해당 출판사에서 작업을 해야 한다고 한다. 해당 출판사에서 작업이 끝나면 그 때 리뷰를 수정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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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가지 분야를 하나의 시각으로 관찰하고 해당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글쓰기 연습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내용도 충분히 좋다. 문화비평에 대해서 조금은 새로운 느낌을 받았다.


정치는 욕망을 따라가야 하는걸까? 우리는 옳바름이 아니라, 욕망에 충실 할 뿐이다.

정치적으로 옳더라도 욕망은 그 올바른 길을 가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아이의 관점에서 남자의 ‘아내’역할이 아니라 ‘아이’의 ‘엄마’ 역할에 충실해야 하지 않는가? 아이가 남자의 것이라는 보이지 않는 소유관계가 있는걸까?

한국 사회는 친모를 양모보다 더 우월하게 파악하는 우생학적 사고를 뿌리 깊게 상식화하고 있다. 이때 친모라는 ‘신분’은 정당하게 남자의 ‘아내’로서 역할을 다했을 때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이다.

‘남자들이 찌질하다’란 말을 이렇게 고급스럽게 할 수 있다.

루저라는 의미화의 권력을 여성이 소유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잉여력 돋움체’의 고급화

상처받은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호출되는 것이 바로 애국주의라는 추상적 논리 체계인 것이다.

예술,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고 사물의 질서를 파괴하는건 안되나?

특정한 대상을 적절하게 복제하는 것이라기보다 새로운 세계관을 통해 사물의 질서를 구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린 폰카로 찍지 않을까? 극도의 리얼리즘인가?

특히 근대의 시작을 알리면서 등장한 리얼리즘이 그렇다. 천사를 그려달라는 주문에 “나에게 천사를 보여주시오. 그러면 그려주겠소”라고 대답했다는 쿠르베Gustave Courbet의 일화는 새로운 세계관으로서 리얼리즘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쿠르베의 반항기가 이런 발언을 하게 했던 게 아니다. […] 리얼리스트 쿠르베는 보는 것만을 그리는 근대적 경험의 눈을 가진 존재였고, 이를 통해 자신의 욕망으로 세계를 읽고자 하는 의지에 충만했다고 하겠다.

식별한다는 것은 안다는 것인데 나는 ‘아름다움’을 알고 있을까?

2008년에 내한해서 강연을 가졌던 자크 랑시에르는 ‘미학’을 “감각적인 것의 나눔” 이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미학이라는 것은 어떤 대상을 식별할 수 있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대중문화가 욕망의 막장을 부추기고 있다. 서로 돕고 있다.

따라서 대중문화가 막장이라는 것은 바로 대중의 욕망이 막장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자신의 관심이 지나쳐서, 타인의 관심으로 폭발하는 ‘오지랖’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 이것이 바로 자기 계발적 담론의 핵심을 이룬다.

‘오직 정보라도 담은 매체’가 되어가고 있는가? 아니 그 정보를 획득할 수 있는 ‘독자’가 있는지 고민해 봐야 할 상황이다.

책을 신성하게 여기는 마음은 분명 의미심장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책이 신앙의 대상으로 머물러 있기만을 바랄 수는 없다. […] 소장의 의미를 상실한 책. 오직 정보를 담은 매체로만 기능하는 책. 애서가로서는 섭섭한 일이지만, 현실은 이렇다.

‘사회’라는게 어딘가 있다는 말인가?!

뒤르켐Emile Durkheim의 말을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이, 모든 자살은 사회의 책임이다.

‘평소에 드러나는 적과 아’를 더욱 선명하게 숨기는 순간 아닐까?

슈미트Carl Schmitt의 말이 옳다면, 정치는 평소에 드러나지 않는 적과 아를 선명하게 갈라 치는 순간이다.

정치적인 영역이 곧 사적 영역인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문장이다.

사적인 영역이 정치를 억압한다면, 공적인 영역은 정치에 대한 열망을 드러낸다. 부르주아는 이 둘을 분리시킨 상태를 일컬어 ‘성숙한 사회’라고 말하지만, 현실은 이런 상상을 언제나 배반한다

우리나라 공인은 ‘연예인’ 뿐이다.

정치인도 공인이다. 그러나 평소에 이들은 전혀 ‘공인’으로 인준받지도, 인지되지도 않는다. 다만 ‘비리’라는 도덕적 잣대에 어긋나는 ‘행위’가 발각되었을 때 이들은 돌연 ‘공인’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출몰한다. 이 상황 자체야말로 한국 사회에 만연한 탈정치성, 또는 정치 자체를 억압하는 쾌락 원칙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명품’으로 두른 갑옷을 입고, ‘학벌’에서 ‘교양’이란 칼을 구매한다.

과거 금이빨을 드러내고 탐욕스런 배를 두드리던 부자의 이미지는 이제 깨끗이 사려졌다. 오히려 이제 부자는 ‘자유’와 ‘교양’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지식경영인’그런거 없다. 있다고 알려져있으나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 그람시Antonio Gramsci가 언급한 의미에서 존재하는 그 ‘유기적 지식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고 싶어도 존재할 수 없는 조건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국에서 지식인 비슷하게 남아 있는 것은 ‘지식경영인’ 정도다. 제도권과 비제도권의 구분이 없어져버렸고, 기성과 재야의 변별이 무색해져버린 상황에서 오직 횡행하는 건 프로젝트형 지식기능인들이다.

훗… “내 글이 어려운 것은 니가 무식하기 떄문이다.”의 고급화법

글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대체로 사전 지식체계에 글의 내용이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과 욕망’

문화비평이 관심을 갖는 건 “왜 특정한 종류의 문화생산물이 다른 것들보다 더 우월한 가치를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지는가”라는 문제다.

Written on August 20,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