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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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하게 녹여낸 삶의 흔적들을 야구로 풀어낸 어느 시인의 즐거운 관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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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모두 선수인 그 곳에서 내 삶의 흔적들은 어떤 야구로 풀어낼 수 있을까?


벤치클리어링은 그런 것이다. 벤치클리어링이 왜 벤치클리어링인가. 벤치를 깨끗이 비우기에 벤치클리어링이다. 뭔가 미묘한 분위기가 감지되면 더그아웃에서 불펜까지 우리 팀원을 위해 현장으로 달려나가는 것이다. 이때 튀어나온 속도로 그 팀의 순위를 가늠할 수 있다. 잘나가는 팀은, 당연히 팀워크도 좋다.

이런 아이들의 합리성은 룰이 복잡하기로 유명한 야구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세상을 배우는 게 아니라, 세상을 만들었던 초등학교 운동장. 그곳에서 벌어진 야구의 조악하나마 지혜로운 원리를 재구성해본다.

“당신도 나도 아직 죽지 않았어. 그러니까 힘내.” 이런 말을 줄여서 ‘파울’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때부터일까. 우리는 많은 걸 가차없이 버리기 시작했다. 쌍방울이 선수를 팔던 즈음부터 성행한 정리해고는 노동자를 너무나도 쉽게 ‘웨이버 공시waiver 公示5’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철저한 구분은 평생을 야구에 바쳐온 젊은이를 싼값에 고용할 수 있는 ‘신고선수’로 만들었다.

기본적으로 투수는 야수의 도움을 받는다. 투수가 혼자 힘으로 모든 아웃카운트를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평범한 타구든, 잡기 어려운 타구든 어쨌든 야수가 잡아서 타자를 죽여야 하는 것이다.

엊그제 예비군 훈련을 함께 받은 우리는 야구선수들의 군 면제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냥 안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군대를 다녀왔으니, 너도 당연히 가야 한다고 인상 쓰진 않았다. 한심한 청춘이었지만 독한 청춘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군대를 가야 남자인 건 맞는데, 그 남자가 너무 너무 남자여서 탈.

천연잔디는 푸르다. 인조잔디는 푸른 것 같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드래프트에서 선발되지 못한 선수들은 쓸쓸하게 집으로, 학교로, 훈련장으로 돌아간다. 매년 7,8백 명이 쏟아져 나오는 드래프트에서, 직업선수가 되는 젊은이는 7,8십 명에 불과하다. 그중 절반 이상은 몇 시즌 못 버티고 방출된다. 국내 야구시장은 프로야구 외에 실업야구 등의 구제책은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해도 무방하다. 수많은 청춘들이 삶의 드래프트, 그 현장에서 묵묵하고 뜨거운 이닝을 함께 버티고 있다. 그 이닝의 끝에 있을 ‘역전만루홈런’을 기대한다.

경기장에 맥주캔을 던진다고? 거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던지는가. 누군가 업무시간에 실수를 저질렀다고 그의 노트북과 책상에 맥주캔과 컵라면 따위를 던지지는 않는다. 참외를 잘못 조준해 던져 홈팀 감독의 뒤통수를 맞추던 정겹던 시대1는 이미 흘러갔다. 우리는 그것을 ‘쌍 팔 년 도’라고 부른다.

그것은 결혼 전에 생년일시 같은 간단한 정보로 궁합을 맞춰보는 양가 어르신의 관계와 비슷하다. 찜찜함이 그들의 영혼을 잠식하는 것이다.

웨이드 보그스4가 수많은 징크스를 지켰던 이유는 사실 불행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이 하루를 사는 방법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모든 선수 또한 매한가지다. 밸런스를 잡기 위해서다. 밸런스는 습관이다. 습관의 기저에는 몸의 리듬이 있다. 몸의 리듬은 반복 속에서 만들어진다. 누구보다 예민한 몸을 지닌 프로선수의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연습을 통해 다져진 몸은 스스로의 신이 되어 자기 자신에게 리듬을 부여한다. 내가 내 몸의 신이 되는 순간, 그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다.

단순함과 숭고함은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어, 그것이 통하는 바늘구멍이 세계신기록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세계에서 가장 멀리 뛰는 여성. 그들은 바늘구멍을 통과한 훌륭한 육체들이다.

하물며, 심판은 당연하게도 야구의 일부다. 심판을 사랑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잊고 있는 점이 있다면, 그들이 틀린 판정보다 옳은 판정을 훨씬 많이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유리한 판정은 좋은 판정이고 불리한 판정은 구린 판정이라는 짜리몽땅한 잣대를 들이밀고 있진 않은가? 나는 몇 번 그랬던 것도 같다.

심판 또한 그들의 권위를 더욱 세심하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선수 또는 감독과 다투면서 끝내 퇴장 명령을 아껴야 할 이유는 없다. 심판이 가장 멋져 보일 때는 경기장 밖으로 손가락을 가리키며 경기를 방해하는 누군가를 퇴장시킬 때이다. 이때 콧바람을 씩씩 불며, 경기장 밖으로 나가는 감독의 모습 또한 멋지다. 하지만 다툼을 대충 마무리하고 서로 아무 일 없다는 듯 ‘좋은 게 좋은 거야’라며 각자 자리에 돌아가는 건 어색하다. 아무도 멋지지 않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란 말이다.

우리의 스윙은 수많은 이론적 지식과 거기에 따라가지 못하는 몸으로 이루어져 있다.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는 전체주의적 관점에서, 모두는 가을을 위한 모두이고, 가을은 곧 모두를 위한 가을이다.

누군가는 당연하게도 형수님이다. 형은 전화를 끊고 작은 차의 시동을 건다. 부르릉, 경차는 가볍고 경쾌하게 신혼집으로 향하지만, 그 작은 뒷모습이 어째 스산하다. 그는 유부남인 것이다.

Written on February 17,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