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얼 퍼거슨의 시빌라이제이션
그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서양 문명을 향해 다가오는 가장 큰 위협은 다른 문명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무기력함, 그리고 그것을 더욱 부추기는 역사적 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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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문명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한 저자를 통햇 서양이 왜 우월한가를 들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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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자부심을 “경쟁”, “과학”, “법치주의와 대의제”, “의학”, “소비”, “직업윤리”라는 6가지 이유를 들어서 주장하고 있는데, 그나마 ‘경쟁’, ‘과학’, ‘소비’는 굉장히 합리적이지만, ‘직업윤리’나 ‘의학’ 같은건 뭔 소리인가 싶다.
미국은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난 동시에 포르노를 재발견했다.
한마디로 우리의 옷차림은 중요하다. 서양의 가장 위대했던 두 차례의 경제 도약, 산업혁명과 소비 사회는 의류와 관계가 깊었다. 첫째는 의복의 더욱 효율적인 생산, 그리고 둘째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옷 입기였다. 서양식 옷차림의 확산은 서양식 생활 방식의 확산에서 분리될 수 없었다. 이슬람 세계에서 서양 의상에 대한 반발이 곧 이슬람교의 세계적 부흥의 증거였듯 말이다. 이란의 혁명가들은 서구화를 지지한 사람들을 프랑스어 ‘faux-col(나비넥타이)’를 본떠 포콜리(fokoli)라 부르며 조롱했다. 오늘날 테헤란의 남성들은 노골적으로 넥타이를 매지 않는다.113 이슬람 공동체가 성장한 서유럽, 특히 런던 거리에서 베일을 쓴 여성들을 보는 것은 상하이 거리에서 축구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유니폼을 보는 것만큼 아주 흔한 일이 되었다. 영국도 프랑스의 뒤를 이어 부르카를 금지해야 하는가? 아니면 블루진이 마오쩌둥의 헐렁한 옷을 몰아냈듯 서양의 소비 사회에 부르카를 대체할 좋은 것이 있는가?
‘검은 선박들’의 위협으로 1853년부터 1854년에 걸쳐 경제를 개방한 이래, 일본은 서양이 나머지 지역에 비해 훨씬 더 부유하고 강력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고심했다. 서양국가 순방(당시 너무나도 흔한 관행이어서 ‘스고로쿠’라는 보드 게임이 만들어지기도 했다)은 더 많은 의문만 불러왔다. 그들의 정치 체제 때문인가? 그들의 교육 제도? 문화? 아니면 옷차림 때문인가? 확실한 답변을 찾지 못한 일본은 모조리 따라하기로 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모방했다. 1889년에는 프로이센 스타일 헌법을 채택하고 1897년에는 영국의 금본위제를 도입했다. 일본의 모든 제도는 서양 모델을 본떠 전면 개편되었다. 군대는 독일군처럼 훈련했고, 해군은 영국군처럼 항해했다. 미국식 초등·중등 공립학교가 도입되었다. 심지어 그전까지 금기시되던 쇠고기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떤 개혁가들은 일본어를 버리고 영어를 쓰자는 제안까지 했다.
혁명은 자신의 아이들만 잡아먹은 것이 아니었다. 그에 맞서 싸운 이들 중 상당수는 문자 그대로 아이들이었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는 겨우 열두 살에 프로이센군의 병장으로 프랑스에 맞서 싸웠다. 진정한 전사이자 학자였던 클라우제비츠는 처참한 패배를 당한 1806년 예나 전투에서 겨우 목숨을 건졌고, 1812년에는 프랑스와 힘을 합쳐 러시아군에 맞서기를 거부했으며, 1815년에는 리니에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이 전쟁이라는 어두운 기술을 어떻게 변모시켰는지 누구보다도, 심지어 나폴레옹보다도 잘 이해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가 죽은 뒤 출간된 걸작 『전쟁론(On War)』(1832)은 오늘날까지도 이 주제에 대해 서양 작가가 저술한 책 중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시대를 초월한 이 작품은 나폴레옹 시대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다. 전쟁 규모가 ‘왜’ 달라졌는지, 그리고 그것이 전쟁 수행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보았듯, 캐롤라이나에 심은 정치적 생명력의 씨앗으로 재산권을 생각해낸 것은 로크였다. 하지만 그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토지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기본 헌법’ 110항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캐롤라이나의 모든 자유 시민은 자기 소유인 흑인 노예의 견해나 종교 문제에서도 절대적인 권력과 지위를 갖는다.” 로크가 보기에 인간에 대한 소유권은 토지에 대한 소유권만큼 식민지 정책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런 노예는 토지 소유권자도, 투표자도 될 수 없어야 했다. 이후 입법자들은 이 차별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1740년 사우스캐롤라이나 노예법 5항에서는 백인이 집이나 농장 바깥에서 백인을 동반하지 않은 노예를 발견하면 구금하거나 심문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36항에서는 노예가 특히 토요일 밤, 일요일, 휴일에 농장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정해놓았다. 법을 어긴 노예는 벌로 ‘중간 강도의 채찍’을 맞아야 했다. 45항에서는 백인이 노예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는 것을 불법으로 정했다.
로크는 캐롤라이나 기본 헌법 제97조에서 영국의 종교적 관용의 허용 범위를 명확히 밝혔다. 우리 농장에서 일하게 될 토착민에게는 기독교가 완전히 생소하기 때문에 그들의 무지, 실수, 우상숭배를 이유로 그들을 추방하거나 혹사할 권리는 인정되지 아니한다. 또 농사를 짓기 위해 다른 곳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은 종교와 자유의 문제에 관하여 다른 견해를 가지는 것이 불가피하며,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가 그들을 막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민간의 평화는 견해의 다양성 속에서 유지되고, 모든 사람과의 합의와 계약은 충실하게 이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합의와 계약을 위반하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이자 우리가 표방하는 진정한 종교에 커다란 수치를 안기는 행위다. 또 유대교도, 이교도, 그 밖에 정통 기독교에 반하는 자들을 겁주거나 멀리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 교리의 진실성과 합리성, 선교사들의 선의와 친절─복음의 원칙과 목적에 어울리는 온화하고 관대한 태도의 적절한 사용과 전도─을 직접 경험할 기회를 주면 진실을 수용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따라서 ‘일곱 명 이상 동의하는 종교는 교회 또는 단체를 구성할 수 있다.’ 이들은 또한 다른 종교와 구별하기 위해 이름을 정할 수 있다.
왕립학회의 의미가 중요한 이유는 단지 새로운 유형의 과학 공동체로서 왕실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경쟁을 통하여 공동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그곳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전형적인 예가 바로 중력의 법칙이다. 뉴턴은 이전 훅의 연구가 없었다면 중력의 법칙을 공식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상, 1703년에 뉴턴이 회장을 맡았던 왕립학회는 새로운 과학 네트워크의 중심이었다. 그렇다고 현대 과학이 전적으로 공동의 작품이라거나 지금도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과학자 개개인이 훌륭한 연구 성과를 올린 것은 이타주의만큼 개인적 야심의 영향도 컸다. 하지만 새로운 발견을 했을 경우 반드시 학계에 발표해야 할 의무 때문에 과학적 지식은─비록 가끔 험악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었지만─점차 누적·발전했다. 뉴턴과 훅은 누가 먼저 중력의 역제곱 법칙 또는 진정한 빛의 성질을 알아냈는지를 두고 심하게 언쟁을 벌였다.43 뉴턴은 중력을 ‘신비한 성질’이라고 일축해버린 라이프니츠 못지않게 지저분한 논쟁을 펼쳤다.44 대륙의 형이상학적 사고와 영국 제도의 경험주의적 태도 사이에는 정말 중요한 지적 경계가 있다. 실험을 통한 수정과 끈기 있는 관찰 같은 고유문화를 지닌 후자가 기술적 진보─이것이 없었더라면 산업혁명도 일어날 수 없었던─를 이루어낼 것이라는 가정이 반대의 경우보다 언제나 더 설득력 있다(5장 참조).45 뉴턴의 법칙부터 1715년 처음으로 화이트헤이벤 탄광 배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용된 (다트머스의 일개 철물상46이었던) 토머스 뉴커먼(Thomas Newcomen)의 증기 기관에까지 이르는 계보는 대단히 짧고 곧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 혁신, 즉 제임스 와트(James Watt)의 개량된 증기 기관(1764), 경도 측정에 사용하는 존 해리슨(John Harrison)의 크로노미터(1761), 리처드 아크라이트(Richard Arkwright)의 수력 방적기(1769)가 같
‘Civilization’이라는 말은 1752년 프랑스의 경제학자 안-로베르-자크 튀르고(Anne-Robert-Jacques Turgot)가 처음으로 사용한 프랑스어였고, 4년 뒤 위대한 혁명당원 가브리엘 리케티(Gabriel Riqueti)의 아버지 미라보 후작 빅토르 리케티(Victor Riqueti)가 처음으로 이 용어를 책에 실었다.2 서론 도입부의 인용문에서 밝혔듯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은 ‘civility’를 선호하며 ‘civilization’이라는 신조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존슨에게 ‘야만’이라는 단어의 반대말을 상징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런던에서 즐긴, 격식을 중시한 (하지만 때로는 노골적으로 무례했던) 도심 생활이었을 것이다. 어원이 암시하듯 ‘civilization’, 문명은 도시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책의 주인공 역시 그런 도시들이라고 할 수 있다.3 도시의 법률은 도시의 성곽만큼이나 중요하다. 도시의 구조와 관습, 주민의 생활 방식도 그 안의 궁전만큼 중요하다.4 문명이란 예술가의 다락방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과학자의 실험실 이야기이기도 하다. 땅의 풍경뿐 아니라 그 땅의 소유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문명의 성공은 미적 업적뿐 아니라 (어쩌면 이보다 더 중요한) 주민들의 삶의 질과 생존 기간으로도 측정된다. 그리고 삶의 질에는 다양한 면이 있어 이를 모두 양적으로 측정하기도 쉽지 않다. 예를 들어 15세기 전 세계인의 1인당 소득이나 수명은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안락하게 살았는지, 위생은 어떠했는지, 과연 얼마나 행복하다고 느꼈는지도 알 수 있는가? 옷가지는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었는가? 근로 시간은 얼마나 되었는가? 일을 하고 받은 보수로 어떤 음식을 살 수 있었는가? 그들이 남긴 예술품이 어느 정도 실마리가 될 수는 있어도 답을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뛰어난 경제학자는 오만하게도 과거보다 미래에 관심이 더 많다고 대답했다. 이제 그는 자기 생각이 틀렸었다는 것을 안다. 사실 ‘미래’라는 것은 없다. ‘미래들’만 있을 뿐이다. 역사에 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하지만 과거는 하나다. 그리고 비록 과거는 지난 일이지만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경험과 내일, 그리고 그 이후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일들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첫째, 현재 세계 인구는 지금껏 지구에 살다간 인구 전체의 약 7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죽은 사람들의 수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수를 약 14 대 1로 압도하는데도 우리는 감히 그들이 남긴 엄청난 양의 축적된 경험을 무시하고 있는 셈이다. 둘째, 과거는 우리 앞에 놓인 찰나의 현재와 수많은 미래를 생각할 때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지식의 원천이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연구가 아니다. 시간 그 자체의 연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