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위의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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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여행에서 무심코 흘려 보냈던 그 많았던 표지판, 이젠 구식이 되어버린 종이 지도, 한번도 사용해 본 적 없는 나침반, 이 모든 것들에 경의를 표하며 읽어갔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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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구글 지도가 정말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지도는 당신을 ‘테라 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 미지의 땅)’ 가장자리까지만 데려가서 내동댕이칠 수도 있고, ‘당신의 현재 위치’를 알려줌으로써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안다는 안도감을 안길 수도 있다.

버틀러는 이렇게 회상했다. “렌더링(rendering, 화상 처리)이 몇 분쯤 진행되자 지도가 떠올랐는데, 나는 그것을 보고 약간 놀랐다. 하나로 뭉쳐 있던 덩어리가 상세한 세계 지도로 변하고 있었다. 대륙을 알아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국경선이 드러난 경우도 있었다. 내가 충격을 받았던 것은, 이 선들이 해안선이나 강물, 정치적 경계선을 뜻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실제 인간관계를 뜻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 저커버그는 이렇게 말했다. “페이스북의 발상은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게 아닙니다. 기존의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공동체를 모두 그려보겠다는 것입니다.” 지도의 언어도 우리 삶에 중요하게 녹아들어 있다. ‘on the map’, 즉 우리(또는 우리 동네)가 지도에 오른다는 것은 우리가 뭔가를 이뤄냈다는 뜻이다. 유달리 정돈을 잘하는 사람들은 매사를 깔끔하게 지도화하며(mapped out), 우리는 자기가 나아가는 방향(compass points)을 잘 알아야지, 그러지 않으면 혼란스러워진다(lose bearings). 또 우리는 오리엔티어링(orienteering)을 하고(옛날 지도는 동쪽이 위쪽에 그려져 있었기 때문에 방향 찾는 일을 orient라고 불렀다), 남에게 마음대로 할 자유를 주면서 ‘약간의 위도를 허락한다(a degree of latitude)’고 말한다(이상은 모두 지도에서 유래한 숙어를 나열한 것이다 - 옮긴이).

그러나 이제는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만의 지도 세계에서 한가운데에 서 있다. 우리는 컴퓨터, 휴대 전화, 자동차에서 경로를 짤 때 A에서 B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서(‘현재 위치로 설정하시겠습니까?’) 다른 곳으로 간다. 모든 거리도 내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측정된다. 우리가 여행을 할 때는 자발적이든 아니든 사실상 우리 자신을 지도화하는 셈이다.

‘히크 순트 드라코네스(HIC SUNT DRACONES, 여기에는 용이 출몰함)’라는 라틴어 문구에 더 관심이 많은데, 이 지구본에서는 적도 바로 아래의 ‘동인도(중국)’에 그 문구가 새겨져 있다. 어쩌면 지구본 제작자는 정말로 중국에 용이 산다고 생각해서 그 말을 새겨 넣었을 수도 있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담은 사실 근거가 거의 없다. 그 여행의 가치는 발견에 있다기보다(폴로 이전에도 여러 사람들이 놀라운 동방 여행을 수행했다) 기록에 있었다. 그의 여행담에 담긴 것은 탐험 자체가 아니라 탐험이 남긴 역사적 발자취고, 그 점에서 그의 책은 지도와 닮았다.

지도화를 거부하는 매력적이고 오래된 그 특징은 벨리니(Bellini)나 카르파초(Carpaccio)의 작품 못지않게 당신을 과거로 끌어들이는 요소이니까.

지도는 우리를 매료시키고 흥분시키고 자극한다는 것, 역사의 경로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 또한 우리가 어디에 있었고 어디로 가는지에 관한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묵묵히 전달한다는 것을.

‘아메리카’라는 단어는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위키피디아에 오류가 있을 경우, 웬 똑똑한 사용자가 용케 눈치채고 과감하게 수정할 때까지 무수히 많은 아이가 학교 숙제에서 그 오류를 고스란히 반복하지 않는가

메르카토르의 유명한 1569년 세계 지도는 대체 무슨 소용이었을까? 그 지도는 왜곡된 부분이 많았고, 실제보다 몇 배 넓게 그려진 나라가 수두룩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지도는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지도와 사실상 같다. 당연히 옛날보다 더 많은 나라가 추가되었고, 해안선과 국경선은 제대로 수정되거나 정치적으로 조정되었지만, 르네상스의 최후에 태어나서 계몽 시대를 지켜보았으며 빅토리아 시대의 교실을 장식했던 그 지도는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선택한 표현 방식으로서 최신 구글 맵스에까지 쓰인다. 〈메르카토르 지도〉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최종적 상징이다. 그것을 함부로 주무르는 건 꼭 테러 행위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그동안 시도한 사람이 없었는가 하면, 당연히 그건 아니었다.

군대도 메르카토르에게 고마워해야 했을 것이다. 포탄을 좀 더 정확하게 쏘도록 도와주었으니까.

지도는 사람들이 세계가 구(球)의 형태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부터, 즉 아리스토텔레스 시절부터 지도 제작자를 골탕 먹였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이었다. 수수께끼란 이것이었다. 어떻게 지구의 굽은 표면을 평평한 해도로 표현할까? 엄격하게 확립되어 있었던 위도와 경도 격자 체계는 이론적 좌표로서는 더할 나위 없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어떤 항로를 나아가는 항해사는 직선이 아니라 곡선 위를 움직이는 셈이었다. 메르카토르는 일찍이 그 굽은 경로를 고리 또는 ‘항정선’으로 지구본에 표현한 바 있었는데, 이제 그것을 지도로 옮겨서 항해사들이 자신의 위치를 금세 파악하고 어떤 목적지로든 경로를 쉽게 찾도록 돕고 싶었다.

그의 도법은 〈메르카토르 지도〉의 ‘지도학적 제국주의’와 ‘유럽 중심의 인종적 편견’에 대한 대안으로 간주되어 유행의 물결을 탔다.

아틀라스는 메르카토르의 1595년 걸작 지도책에 등장함으로써 이후 지도책을 가리키는 용어로 제 이름을 빌려주게 되었다.

이 지도책은 미국 컨테이너 조합이 비매품으로 적은 수량만 찍은 것이라서 상업적으로 팔리진 않았다. 그러나 세계 유수의 참고 자료 도서관들은 이 지도책의 가치를 알아차려, 어떻게든 한 부씩 손에 넣었다. 출간된 지 6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 책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역시 1950년대에 등장했던 헬베티카 서체47만큼이나 지금껏 신선하고 획기적이다.

우리는 왕정복고 시절의 외설적인 희극들을 통해서 당시 런던에 빈민가와 누추함과 폭력이 넘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이 지도에서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라고는 오길비와 모건이 별도의 소책자로 제공한 기다란 색인에 등장하는 지명들뿐이다. 후커스(창녀) 코트, 피어리(사나운) 필라, 스커머(쓰레기 걷어내는 사람) 앨리, 대거(단검) 앨리, 픽액스(곡괭이) 앨리, 다크 엔트리(어두운 입구), 슬로터(도살) 야드…… 아쉽게도, 오길비가 태어나기 전인 16세기에 영국의 여러 도시에서 융성했던 한밤의 환락가를 뜻하는 지명, ‘그로웁컨트(Gropecunt, 여성의 성기를 움켜쥔다는 뜻 - 옮긴이) 레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영국 육지측량부는 거의 2세기 뒤에 GPS(전역 위치 확인 시스템)가 등장할 때까지 모든 작업을 삼각 측량법에 의존했다. 그 기법을 처음으로 주창한 사람은 윌리엄 로이였다. 1763년에 부(副)병참감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그는 온 나라를 1마일당 1인치 축척으로 삼각 측량 하자고 제안했다.

60년쯤 진행된 사업은 다른 의미에서도 자못 영국적이었다. 측량사들이 극한의 기후와 밀림을 지도학적으로 길들이느라 분투하면서 열병, 말라리아, 호랑이에게 만신창이가 되었던 과정은 몬티 파이손(Monty Python)풍으로 패러디해도 좋을 만큼 황당했기 때문이다.54

에베레스트의 정확한 높이를 계산한 사람은 총명한 인도 수학자 라다나트 시크다르(Radhanath Sikdar)였다. 계산 결과는 2만 9,000피트(8,839미터)였지만(정상으로부터의 거리가 170킬로미터에서 190킬로미터에 이르는 여섯 군데 측량소에서 잰 값들의 평균이었다), 사람들이 혹시 근삿값으로 여길까 싶어서 발표는 2만 9,002피트(8,839.8미터)라고 했다.

우리가 과거의 〈육지측량부 지도〉들을 한 무더기 쌓아놓고서 훑어본다고 하자. 지도를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지금은 사라진 옛 풍경의 사회사를 달리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수준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지도는 산업적, 기술적 발전은 물론이거니와 해당 지역의 위생 상태, 여행과 건축의 경향성, 여가 활동과 언어적 변덕을 기록했다. 스스로도 뚜렷이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조금씩, 흡사 머리숱이 줄듯이, 오랜 세월에 걸쳐.

사이먼 킹은 우리에게 자연의 원칙을 존중하여 “오직 발자국만 남기고 오직 추억만 가지고 돌아오라”고 말하면서 끝맺었다. 그러자 워크숍 진행자는 종교적 각성을 촉구하는 듯한 말투로 이렇게 외쳤다. “이제 여러분은 스스로 길을 찾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대부분의 참가자가 지도를 샀다. 종이 지도를. 가까운 시일에 꼭 펼쳐보리라고 다짐하면서

치명적 질병을 시각적으로 묘사한 지도가 처음은 아니었거니와, 그 속에 담긴 과학은 엄밀성이 떨어졌다. 그러나 오늘날 그 지도는 빅토리아 시대의 제일 중요한 지도 중 하나로, 일종의 상징적 존재로 여겨진다. 그리고 의학적 미스터리를 초보적 탐정 기법으로 풀었던 이야기에 젊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그의 지도는 「셜록 홈스」58나 「닥터 하우스」59와 같은 반열에 오른다.

스노의 지도 자체도 빼놓을 수 없다. 세밀한 축척, 상세하게 묘사된 거리와 골목. 오늘날 그 지도를 본 사람들 중에는 직접 그 거리를 걷고 그 동네의 소음과 활력을 맛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지도는 당시의 공공 지도로서는 드문 수준으로 세부에 집중했다.

『보물섬』은 우리 모두에게 해적, 앵무새, 의족, 럼 배급, 브리스틀 억양을 쓰는 선원들의 반란에 대한 이미지를 안겼다. 그 속의 보물 지도는 소설의 플롯을 이끄는 역할에만 그치지 않았다. 요즘도 우리가 보물 지도라고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를 구축한 게 바로 그 지도였다. 테두리가 깔쭉깔쭉하고, 장난으로 대충 그린 것 같고, 종잇장은 누렇게 바랜 데다가 동그랗게 말렸고, 그것을 안내 삼아 확신 있게 길을 찾기에는 표시된 정보가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건 모험에 나서게 만드는.

5년 뒤, 톨킨의 『호빗』64이 출간되었다. 역시 보물을 추적하는 이야기인 이 책은 면지에 지도가 인쇄되어 있었다. 지도는 〈반지의 제왕〉 삼부작에서도 결정적인 요소였다. 톨킨의 지도들은 현대 대중문화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지도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바로 그 지도들로부터 지난 몇십 년 동안 판타지라는 장르가 탄생했고, 책과 지도와 게임을 아우르는 판타지 세대가 탄생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보물 지도뿐 아니라 모든 지도를 좋아했다. 지도라는 개념을 좋아했고, 지도라는 물건이 착 접혀 손아귀에 들어오는 느낌을 좋아했다. 지도의 지명들을 좋아했고, 지도가 길을 찾아주면서 길을 잃게도 만든다는 사실을 좋아했다.

지도는 관광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관광객을 안내했다. 관광을 뜻하는 영단어 ‘투어(tour)’는 그리스어로 원형 운동을 뜻하는 ‘토르노스(tornos)’에서 비롯했는데, 중세 영어에서 그 뜻이 확장되어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여행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탄생한 『론리 플래닛』은 1974년에 동남아시아 육로 가이드북으로 첫선을 보였고, 『러프 가이드』는 1982년부터 유럽을 다루기 시작했다.

그런 신세계에서, 출간되자마자 흘러간 정보가 되어버리는 가이드북을 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사람이 매 순간 어디 있는지 아는 능력은 ‘전투 공간에 대한 주도적 인식(DBA)이라는 군사 개념과 딱 떨어지게 대응한다’는 것이다. J. K. 롤링(J. K. Rowling)이 정말로 현실의 군대에 영향을 미쳤는지 그 반대였는지는 더 토론할 문제이겠지만.

그는 그 공간을 정보로 채우고 싶었다. 지구본이 클수록 태평양은 더 넓어지므로, 그는 온갖 종류의 정보로 바다를 채울 계획이었다.

벨러비는 답을 알 것 같았다. 그것은 그가 얼마나 타협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었다. 꼭 가격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만일 지구본 적도 부분에 경첩을 달아서 술병 보관함으로 쓰도록 허락한다면, 세계 최고의 지구본 제작자가 되겠다는 스스로의 바람을 훼손한 것처럼 느껴질까? 그는 태평양 부분에 광고를 실을 의향이 있을까? 공항 퍼스트클래스 라운지에 진출할 수 있다면, 자신의 작품 위에 기꺼이 그물망 같은 노선도를 입힐 마음이 있을까? (마지막 딜레마에 대한 답은 ‘절대로 그렇다’였다. 항공사 담당자들이 그의 전화에 답신하기만 한다면야.)

이윽고 차내 디지털 지도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안내를 따르기를 원했다. 이름 모를 회사들을 기꺼이 믿으면서, 그 회사들이 이전에는 운전자 스스로 그럭저럭 찾아갔던 장소로 이끌어주기를 원했다. 휴대 전화에서도 비슷한 변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의 화성 지도들은 우리에게 지도의 진정한 낭만을 보여주었다. 이후 드러난 현실을 전폭적으로 반겼던 것은 어쩌면 과학자들뿐이었을지도 모른다.

니카라과는 코스타리카를 침략했을 때 구글 맵스 탓을 했죠. 우리 지도의 국경선이 올바르지 않았다는 겁니다. 구글이 자기네한테 준 땅으로 진출한 것뿐이라나요.”128

디지털 지도의 빛나는 전망에는 어두운 면이 또 있다. 새로운 디지털 지도 기술은 비트와 원자와 알고리즘의 혼합이므로, WiFi와 GPS를 사용하는 모든 기기가 신호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보낼 수도 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렇게 전송되는 정보 중에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제공하는 것도 있다. 사진 공유 프로그램이나 애플리케이션에서 위치 입력 기능을 켜뒀을 때, 아니면 위성 항법 장치가 우리의 운행 정보를 회사에 제공하도록 허락했을 때가 그렇다. 반면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게서 빠져나가는 정보도 있다.

애플이 직접 대부분의 지도를 작성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미 톰톰으로부터 텔레아틀라스 지도의 사용권을 구입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애플의 의도는 명백했다. 지도가 오늘날의 새로운 격전지이니, 더는 경쟁자에게 의지하거나 경쟁자의 제품을 선전해주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빙 맵스 설계를 주도한 블레즈 아게라 이 아르카스는 자신의 제품을 참신한 방식으로 선전했다. 그는 그것이 일종의 “정보 생태계”이고, 그것이 제공하는 “공간적 캔버스…… 위에 온갖 종류의 작업을 결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재미나게도 블레즈 아게라 이 아르카스는 2013년 말에 마이크로소프트를 떠나 구글로 옮겼다 - 옮긴이).

Written on February 17,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