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의 역사 (상)
수학은 추론의 형식이지 디오판투스의 대수와 같은 비법의 모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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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기하학의 발전사라고 부제를 달아도 충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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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인도의 수학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서구 중심적’ 사고를 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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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으로 세거나 5와 10을 기본수로 하여 세는 습관은 역사적으로는 2와 3을 기본수로 하여 헤아리는 방법보다 늦게 생겼는데도, 거의 예외 없이 2진법, 3진법은 10진법으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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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수준과 특징을 고려하면서 인류의 과거를 연대와 시대로 나누는 것이 통례이다. 그와 같은 구분이 쓸모 있긴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편의를 위해 임의로 짠 단순한 틀에 지나지 않고, 이것이 만들어 내는 시대 구분이 금을 긋듯이 그어지는 것이 아님을 늘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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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의 첫 사반세기가 끝나 가는 무렵에서야 메소포타미아가 수학에 이비자한 것에 괗나 연구가 인정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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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쩄든 이집트의 수학은 상당히 다행스런 출발을 하였지만 그 뒤 약 2,000 년 동안은 정체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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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이전의 수학에 많은 결함이 있었음은 아주 분명하다. 남아 있는 파피루스와 점토판에는 특별한 경우를 다룬 문제만 실려 있고 일반적인 공식화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이들 초기의 문명이 수학의 핵심이 되는 통일 원리를 정말로 이해하고 있었는지 의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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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는 것보다 심각한 일은 정확한 값과 어림셈한 값 사이에 확실한 구별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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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리스 이전의 문화는 수학 자체에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거나 전혀 갖지 않았고 오로지 실용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었다고 오해받기도 한다. 여기서도 명백한 증거보다는 판단의 문제가 얽혀 있다. 그 당시도 지금처럼 인류의 대다수는 생존을 위한 절박한 문제에 매달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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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스를 최초의 수학자라고 하게 된 것은 세 사람의 주석자의 손을 거친 프로클로스의 이 인용문에 따르는 바가 크다. 프로클로스는 뒤에 다시 에우데무스에 의존하면서 ‘주석’ 가운데 앞서 기술한 네 가지의 정리를 탈레스의 업적으로 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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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그리스인이 기하학을 논리적 구조 위에 세운 것을 널리 인정한다. 그러나 이 중요한 한 걸음이 탈레스가 내디딘 것인가 아니면 그 뒤의 사람이 내디딘 것인가라는 커다란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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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타고라스 학파가 수학에 새로운 중점을 주었고, 피타고라스 학파의 수학은 일상 생활의 일보다도 ‘지혜에 대한 사랑’과 더욱 밀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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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논의 논의는 그리스 수학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그 영향은 이 제논의 논증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 약분할 수 없는 양의 발견이 가져다 준 영향과 맞먹을 정도이다. […] ‘원론’에서는 정수조차도 선분으로 나타내고 있다. 수의 영역은 이전의 이산적 성질을 계속 유지했지만, 연속량의 세계가 되면 수와 별개로 기하학적 방법으로 다루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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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에 이이서 유클리드는 공준 다섯 개와 공통개념 다섯 개를 들고 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리와 공준을 확실히 구별하였다. […] 전자는 자명한 명제, […] 후자는 학습자의 동의를 전제로 하지 않아도 되는 사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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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꿔 말하면 1,800년쯤 뒤의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가능하게 한 것이 아폴로니우스의 순수 수학이었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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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로마는 오랜 역사를 통해 과학과 철학에 이바지한 바가 거의 없었으며, 수학에 대해서는 한층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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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콰리즈미의 산술을 통해서 알콰리즈미라는 이름은 흔한 영어 낱말이 되었다. 가장 유명한 저서의 제목 ‘복원과 축소의 과학’에서 더욱 잘 알려진 일상어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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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트가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대수학이었는데 여기서 그는 근대적 사고에 가장 근접했다. 수학은 추론의 형식이지 디오판투스의 대수와 같은 비법의 모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