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지의 최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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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세상 그 너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다. 그리고 지식에 대해서 혹은 내가 가질 수 있는 지식에 대한 갈망과 목마름을 강렬하게 느꼈다.


“정 부장, 비행기 몰 줄 알아? 나침판 바늘을 동남아 방향으로 놓고 날아가봐. 타이가 아니라 타히티가 나올걸.” 이번엔 웃음 대신 슬며시 부아가 치밀었다. 한국에서 보면 동남아는 분명 서남쪽에 있는데 왜 우리는 동남아라고 부르는가. 아니, 그렇게 불러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가 사는 땅도, 우리 자신도, 우리를 중심으로 생각하며 지내온 적이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서양 사람(유럽인)의 머리와 서양 사람들의 말을 빌려 쓰며 오늘까지 살아온 셈이다. 왜 이 교수가 아시안 게임을 단순한 스포츠 행사로 보지 않고 그 이름의 어원부터 의심을 품고 따져보려 했는지 분명해졌다. 어디 지역의 이름뿐이겠는가. 스포츠란 말도 따지고 보면 그리스에서 온 말이다. 그래서 물었다. “가망 없네요. 아시안 게임? 그거 다 가짜네. 아시아란 말, 게임이란 말. 그 많은 아시아인들이, 지금 인천에서 하는 체육 경기가 허깨비 놀음처럼 보여요. 그러니까 아시안 게임이란 게 그리스 사람들이 만든 올림픽의 짝퉁 행사잖아요?”

“니덤은 아주 신통한 말을 했어. 그 왜 잘나가는 시오노 나나미(しおのななみ), 그녀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말한 적도 있는 얘긴데 말이야. 로마 가도를 세우면 만리장성이 생기고, 만리장성을 눕히면 로마 가도처럼 된다. 같은 돌, 같은 기술을 가지고 하나는 유럽 전체를 뚫고 하나는 아시아 전체를 막은 거지. 유럽과 아시아의 이 차이가 이렇게 한 대륙을 둘로 나눈 게야. 이미 말이야, 아리스토텔레스도 오늘의 아시아라는 개념과는 달랐지만 『정치학』에서 이런 말을 했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속에는 여러 민족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아시아는 문명의 대륙이고 유럽은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야만의 대륙이라는 거다. 아시아인은 지적이지만 자유가 없는 큰 제국에 살고 있다고 봤다. 그에 반해 유럽인은 자유로우나 조금 우둔하고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네들처럼 폴리스 같은 나라를 만들 수 없다고 여겼다. 오직 그리스인들만이 자유로우면서도 동시에 지적이기 때문에 훌륭한 성질을 가졌다는 것이다. 즉 아시아와 유럽의 해안에 살면서 폴리스라고 하는 국가를 만들어 자유로운 문명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대개 방향은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동서남북이 만들어지지 않나.

“저희들은 한가운데 있으니 동서남북으로 오랑캐가 있는 거야. 그러니 동이든 서든 자랑할 게 없어. 한자 세대? 모르는 게 약이야. 그 한문으로 써놓고 보면 말이야, 전부 버러지 아니면 짐승을 가리키는 글자들이야. 남만에는 벌레 충(蟲)이 있고 서쪽에는 개란 뜻의 융(戎)이 있고, 북적의 적도 역시 짐승을 뜻하는 개사슴록 견(犭) 변을 써. 그런데 동이의 이(夷)는 활 궁(弓)에 사람 인(人)을 합친 글자야. 동이에만 사람이 들어 있어. 그나마 동이족만은 사람대우를 한 셈이야.”

이 교수가 여성부 주최의 국제 세미나에서 단상에 오르자마자 “여러분 제 말을 듣기 전에 저 비상문부터 보시죠. 저게 남자입니까, 여자입니까?”라고 말하자 비로소 회의장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는 거다. 이 교수가 “예, 그렇지요. 화날 만도 하지요. 불나면 여자들은 앉아서 타죽으란 얘기입니까?” 농담을 던져 청중을 웃겼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알기로는 지금까지 한국의 여성 단체나 페니미스트 운동가들 중에서 그 누구도 이것에 항의를 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매스컴에서도 이 문제를 떠든 사람들이 없다는 거다.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시하면서 거의 매일같이 저 비상문 그림들을 보아왔던 거지요. 정말 페미니즘 문제가 우리 몸에 살과 피로 배어 있었다면,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여성 해방론이었다면, 분명 항의하는 사람이 나타났어야 할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자기 이해에 관련된 것이 아니면 모른 체하고 추상적인 담론에만 몰두하는 여성론이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것이 아닌지요.”라고 여성 문제 세미나의 화두를 꺼낸 것이다.

하지만 각각의 단어가 따로따로 있다가 그게 모이면 한 문장을 만들어낼 수가 있는 거거든. 성당의 벽돌은 하나하나이면서도 그것들이 어울리면 아름다운 돔을 만들어내잖아. 같은 벽돌 가지고 담 쌓아봐, 그냥 벽이야.”

Written on April 25,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