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교양
“세금은 낮고 복지 수준은 높은 사회. 이런 사회를 만들면 되는 게 아닌가? […] 실현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세금을 인상하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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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이란 단어가 가져다 주는 무의미함에 대해서 ‘Citizenfour’ 이후로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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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의 다이제스트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은 내용이 중복되는 점이 있기 때문인데,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장’의 측면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내용이 어떻게 변주되는지 찬찬히 읽어보는 재미도 있다.
“성적이 5등급인 학생은 자신이 공부를 못한다고 부끄러워하고, 월 90만 원의 중위소득을 얻는 성인은 자신의 무능을 부끄러워한다. 평균적인 성적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고, 평균적인 소득으로도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경제적 환경이 조성된 사회가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은 사회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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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국채를 발행해야만 한다. 그만큼 국가의 빚은 늘어나고, 재정 건전성은 악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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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현대인들은 복잡하고 다채로운 사회적 쟁점에 자연스럽게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보통의 현대인들과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 사이에 투쟁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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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물인 운동화는 생산의 주체인 X씨를 밀어낸다. 운동화는 X씨를 소외한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말했던 노동의 소외 현상이다. 근대 산업화 사회에서는 기쁨 하나가 사라진다. 그것은 성취와 보람이라는, 노동을 통해 얻는 기쁨이다. 생산물이 나를 소외하는 환경에서 성취와 보람을 느낄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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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지속적인 평가가 학생들에게 개개인 간의 경쟁이라면 언제나 정당하다는 환상을 심어준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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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경쟁이라는 형식을 거쳤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정한 경쟁이라면 그 결과는 정당하다고 믿는다. 경쟁 자체는 정당한데, 자신이 무능해서 경쟁에서 실패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사회적 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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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근대에 들어서면서 산업화와 상업자본을 바탕으로 막대한 부를 소유한 사람들인 부르주아가 있다. 이들은 ‘자본가’ 또는 ‘유산계급’으로 번역되는데, 공장이나 농장, 거대 자본 등의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들을 말한다. 다음으로 부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인 프롤레타리아가 있다. ‘노동자’, ‘무산계급’으로 번역되는 이들은 먹고살기 위해서 부르주아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부르주아의 생산수단에 고용되어서 노동을 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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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확대의 본질은 투자가와 사업가가 져야 할 리스크를 다수의 노동자에게 전가한다는 것이다. […] 노동 시장의 유연성은 그에 대응하는 고용 안정성 정책과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이에 대한 가능성은 잠시 후 [교육] 부분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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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오늘날 학교라는 형식에서 우리가 실제로 교육받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진리에 대한 이념’과 ‘경쟁의 정당성에 대한 믿음’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체화한 채로 학교를 졸업한 후 사회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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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보수와 진보, 세금과 복지의 문제를 합의와 절충의 문제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 선과 악의 이념 대립으로 다루려고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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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 있는 대부분의 상품 가격은 내려간다. 이를 ‘기술발전 디플레이션’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