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로마인 이야기 1권(2014.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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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에는 완벽하지만, 발전을 저해받기 쉬운 언덕을 좋아한 에트루리아인. 방어가 불완전한 곳에 도시를 건설한 덕분에 결과적으로 밖을 향해 발전하게 된 로마인. 통상에는 편리하지만, 자칫하면 적의 존재를 잊게 만드는 바닷가에 도시를 세운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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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전설의 가치는 그것의 사실 여부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것을 믿어왔는가에 있다. 로마인은 줄곧 자기네가 트로이 영웅의 후예라고 믿었고, 그리스인조차도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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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로마는 두 명의 왕을 모시게 된 셈이다. 또한 사비니족의 자유민에게는 로마인과 똑같은 완전한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사유재산에 관한 모든 권리와 함께 민회에서의 투표권도 갖게 된 것이다. 사비니족 장로들에게는 원로원 의석도 제공되었다. 로물루스로서는 인구 증가와 병력 증강을 위한 방책이었겠지만, 이 방식은 당시 로마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한 성과를 올리게 된다.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패자조차도 자기들에게 동화시키는 이 방식만큼 로마의 강대화에 이바지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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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마는 로마 시민들을 각종 직능별로 분류하고, 모든 시민이 독자적인 수호신을 갖는 단체에 소속되도록 했다. 목수조합, 철공조합, 염색공조합, 도공조합 등이 있었다. 직능별 단체를 결성한 것은 백성들에게 직업에 대한 긍지를 갖게 하려는 목적보다는 라틴족과 사비니족의 부족간 대립을 막으려는 목적이 더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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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마는 이런 신들을 정리하여 계급을 부여했다. 하지만 어떤 신 하나를 정하여, 이것이야말로 로마의 신이라고 규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신들을 공경하는 일의 중요함을 가르쳤다. 그리스와 로마로 대표되는 다신교와 유대교 및 기독교를 전형으로 하는 일신교의 차이는 다음 한 가지뿐이라고 생각한다. 다신교에서는 인간의 행위나 윤리도덕을 바로잡는 역할을 신에게 요구하지 않는 반면, 일신교에서는 그것이 바로 신의 전매특허다. 그리스 신화에서 볼 수 있듯이, 다신교의 신들은 인간과 똑같은 결점을 지니고 있다. 윤리 도덕을 바로잡는 역할을 맡지 않기 때문에, 결점을 지니고 있어도 전혀 지장이 없다. 하지만 일신교의 신은 완전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내버려두면 감당할 수 없게 바로잡는 것이 신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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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단 지휘관이 바라는 점괘를 내놓게 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요컨대 병사들이 길조라고 믿으면 그만이다. 윗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깨어 있었다. 하지만 로마의 종교를 생각할 때 특히 주목해야 할 특징은, 다른 민족과는 달리 로마에는 전임 신관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로마인은 세속의 일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신과 인간 사이에서 중개 역할만 하는 사람을 따로 두지 않았다. 로마의 대신관과 사제들은 신의 가르침을 대변하는 사람이 아니다. 신을 대신하여 신의 존재를 지상에서 보여주는 사람도 아니다. 신관이나 사제가 되는 데에는 특별한 능력도 필요없고, 그 능력을 기르는 훈련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무녀를 제외하면 보통 사람과 똑같은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최고신관부터 사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직자는 민회에서 선거로 결정되었다. 집정관을 비롯한 정부 관리와 아무 차이가 없다. 말하자면 국가 공무원이다. 신관에 대한 고마움은 줄어들지 모르지만, 이점도 적지 않았다. 고정된 계급이 아니니까, 다른 계급이나 관직에 대한 질투심이 생기지 않는다. 자기가 속해 있는 계급을 보전하기 위해 종교를 지나치게 존중하는 일에 집착할 필요도 없다. 이런 로마에서는 종교와 정치의 불화나 유착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정교 분리를 참으로 자연스럽게 정착시킨 것이야말로 누마가 이룩한 가장 중요한 업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력 기원이 기원전에서 기원후로 바뀔 무렵에 살았던 그리스의 역사가 디오니시오스는 ‘고대 로마사’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로마를 강대하게 한 요인은 종교에 관한 사고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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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신도 인정한다는 것은 곧 남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누마의 시대부터 2천 70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우리는 일신교적인 속박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하지만 인간의 윤리도덕이나 행위를 바로잡는 역할을 맡아주는 형태의 종교를 갖지 않을 경우, 짐승과 같은 상태에 바지고 싶지 않으면 개인이든 국가라는 공동체든 간에 자기정화 체제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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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그리스에서 태어났다. 특히 소크라테스 이후 그리스 철학의 흐름은 그리스인의 이런 사고 경향이 맺은 열매다. 인간의 행동 원칙을 바로잡는 역할을, 종교에 맡긴 유대인. 철학에 맡긴 그리스인. 법률에 맡긴 로마인. 이것만 보아도 이 세 민족의 특성이 떠오를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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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아이를 키우고 남편을 섬김으로써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여자라도 자녀가 없는 미망인은 그런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어 기병이 타는 말의 유지비로 매년 200아세를 낼 의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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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정 로마에서는 원로원에서 연설할 때, “원로원 의원 여러분” 하고 부르는 대신, “파트레스, 콘스크리프티”라는 호칭으로 연설을 시작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이것을 직역하면 ‘아버지들이여, 신참자들이여’가 되는데, 이 호칭이 관용구가 된 것은 공화정이 시작된 기원전 509년부터다. 부루투스의 개혁으로 많은 신참자가 원로원에 자리를 얻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원로원 의원과 신참 의원을 구분해서 부르는 방식은 얼핏 보기에 구제할 수 없는 폐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꽤 교묘한 방식이었던 것 같다. ‘파트레스’라고 말하여 구세력을 먼저 대우한다. 그런 다음 신흥세력을 언급하는데, ‘신참자들이여’ 라는 호칭을 계속하는 한, 신참자가 새로 들어올 가능성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로마 원로원은 사실 원로원이라는 우리말 번역에서 연상하기 쉬운 완고한 노인들의 집단은 결코 아니었다. 모든 의원들이 “파트레스, 콘스크리프티”라는 호칭으로 연설을 시작하는 것이 관례가 되고, 그러는 동안 원로원의 문호를 신참자에게 개방하는 데 대한 저항감도 누그러진 게 아닐까, 물론 이것은 사료의 뒷받침이 없는, 단순한 상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말의 힘이라는 것도 그렇게 얕볼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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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의 로마법은 말하자면 불문율의 집성이었고,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지배계급뿐이었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민중이 법의 성문화를 요구했다. 법을 글로 표기하면 누구나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민중의 권리 획득은 흔히 법의 성문화를 요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로마 지배계급의 구심체인 원로원은 처음에는 이에 대해 반대했다. 귀족정치라고 불러도 좋은 공화정이 수립된 뒤 아직 반세기도 지나지 않았다. 그들의 기개는 왕성했고, 그들이 제일선에 서서 지킨 공화정 로마의 국경은 평화로왔다. 그러나 로마 민중의 유효한 무기를 갖고 있었다. 일종의 파업이라 할 수 있는 병역 거부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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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의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말에 따르면 페리클레스 자신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의 정치체제는 다른 나라의 제도를 흉내낸 것이 아니다. 남의 이상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로 하여금 우리의 모범을 배우게 하는 것이다. 소수의 독점을 배격하고 다수의 참여를 수호하는 정치체제, 그 이름을 민주정치라고 부른다. 이 정치체제에 있어서는 모든 시민이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공적 생활에 봉사함으로써 주어지는 명예도 세인이 인정하는 그 사람의 능력과 업적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고, 출신 가문이나 성장 과정에 따라 주어지는것은 아니다. 설령 빈곤 속에서 입신했더라도, 나라에 유익한 능력을 가졌다면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그 길이 막히는 일은 없다.우리는 어디까지나 자유로이 공사에 이바지할 길을 가졌으며, 또 사적인 생활에서도 나날이 완벽한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의심이나 질투가 소용돌이치는 것까지도 자유라고 말할 만큼 완벽하다. …그러면서도 나날이 수고를 잊게 해주는 교양과 오락을 만끽하고, 경기와 제전을 해마다 정해진 날에 개최하고, 주거도 쾌적하게 정돈하는 것이 중요함을 잊지 않는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상호간의 간격은 크다. 그들(스파르타인을 말함-역주)은 어릴 적부터 엄격한 훈련을 실시하여 용기를 함양하기에 힘쓰지만, 우리는 자유의 기풍 속에서 자라면서도 위기가 닥쳤을 때는 물러나는 일이 없다. 우리는 시련을 대할 때에도 그들처럼 비인간적인 엄격한 훈련을 받은 뒤의 예정된 결과로써 대하지는 않는다. 우리 개개인이 가진 능력을 바탕으로 한 결단력으로 시련을 대한다. 우리가 발휘하는 용기는 관습에 얽매이고 법률에 규정되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아테네 시민 개개인이 일상생활을 할 때 갖고 있는 각자의 행동원칙에서 생겨난다… 우리는 질박함 속에 미를 사랑하며, 탐닉함이 없이 지를 존중한다. 우리는 부를 추구하지만, 이것은 가능성을 우지하기 위함일 뿐, 어리석게도 부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또한, 일신의 가난을 인정함을 수치로 여기지 않지만, 빈곤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게을 리함은 깊이 부끄러워한다. 우리는 사적인 이익을 존중하지만, 그것은 공적 이익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서다. 사익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사업에서 발휘된 능력은 공적 사업에도 응용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곳 아테네에서는 정치에 무관심한 시민은 조용함을 즐기는 자로 여겨지지 않고, 시민으로서 무의미한 인간으로 간주된다… 종합해서 말하면, 우리 아테네는 모든 면에서 그리스의 학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아테네의 시민이라는 명예와 경험과 자질을 종합체로서, 하나의 완성된 인격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사실을 바탕으로 한 진실이라는 증거로, 우리의 이런 사고 방식으로 구축된 국력이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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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는, 강국이 될 수는 있었지만 패권 국가의 자리에 계속 머물 수는 없었다. 스파르타인의 생활양식은 밖으로 수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타국인은 ‘스파르타식’에 매력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을 억누르기에는 1만 명의 스파르타 전사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배타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전사의 수를 늘릴 수도 없었다. 기원전 371년에 스파르타는 패권을 잃고, 테베가 스파르타를 대신하여 패권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테베의 패권 시대도 10년을 넘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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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은 패배하면 반드시 거기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기존 개념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개량하여 다시 일어서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지는 방식이 좋았기 때문은 아니다. 지는 데는 좋은 방식도 없고 나쁜 방식도 없다. 패배는 어디까지나 패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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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그 패배에서 어떻게 일어섰는가 하는 것이다. 패전 처리를 어떤 방식으로 했느냐가 문제다. 기원전 390년의 켈트족 침략에서 로마인은 몇 가지를 배웠다. 그 중 하나는 국론 분열의 어리석음이다. 귀족파와 평민파로 양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야만족에 불과한 켈트족한테 실컷 당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분열도 기원전 367년의 ‘리키니우스 법’으로 해소하는데 성공했다. 국정의 모든 요직을 평민 출신에게 전면적으로 개방한 이 정치 개혁은 얼핏 보기에는 평민에 대한 지나친 양보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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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00년에는 신에 대한 제사를 맡는 직책까지도 평민 출신에게 개방했다. 하지만 이런 개혁으로 로마는 귀족과 평민의 대립관계를 귀족이 평민을 끌어안는 관계로 바뀌었다. 그 결과는 금세 나타났다. 로마는 로마인이 가진 모든 역량을 투입할 수 있는 체제, 즉 국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는 체제를 확립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로마가 강대해진 첫번째 요인은 로마의 독특한 통치체제 확립에 있었다고 생각한 그리스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켈트족 침략에 대해 “이때를 계기로 로마의 융성은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정 개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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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정 이외에 외치가 아직 남아 있다. 로마인은 외치 면에서도 켈트족에게 대한 패배에서 배운 교훈을 현실화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외치 면에서의 개혁은 타국과의 관계를 재평가하는 것이었다. 영국에서 2천 300년 뒤에 태어난 역사가 토인비는 이것을 ‘정치 건축의 걸작’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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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왕정 시대부터 이미 이웃 부족들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다. 부족은 다르지만 라틴어라는 공통된 언어를 사용하고, 종교도 같고 풍속도 비슷한 부족들의 집합체였기 때문에, 총칭하여 라틴 민족이라 부르고 그 부족들 사이의 동맹도 ‘라틴 동맹’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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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패자를 예속시키기보다는 패자를 자신의 ‘공동 경영자’로 삼는 전략을 채택했다. 이것은 타국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방식이었다. 이것이야말로 후세에 유명해진 ‘분할하여 지배하라’는 사고방식의 탄생이기도 했다. 로마를 제외한 네 가지 부류의 나라들은 로마를 중심으로 하여 마치 나이테를 그리듯 차례대로 ‘무니키피아’, ‘콜로니아’, ‘소키’로 나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네 종류의 ‘동맹국’은 서로 뒤섞여 있었다. 로마가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특히 전략적 요충에 군데 군데 세워진 식민지는 동맹국끼리의 공동 행동을 분단시키는 역할도 맡았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이점도 많은 대신 결점도 적지 않았다. 가장 큰 결점은 로마에서의 지령이나 파병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 무렵부터 계획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한 로마 가도는 바로 이 문제의 해결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