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에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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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욕은 곧 죄라는 자체검열 시스템이 작동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갈등을 느끼는 이유는 성욕 자체에 있다기보다 순영이가 ‘아내인가 아닌가’라는 데 있다. 즉, ‘혼전순결’에 대한 것이다. 그의 결론은? 혼인을 하기 전에는 스킨십은커녕 내복의 단추 하나도 끌러서는 안 된다는 것. 이 정도면 가히 ‘순결 근본주의’라고 해도 좋겠다. 그러면 대체 왜 이렇게까지 지독하게, 거의 성고문에 가까운 금욕을 감내하는가? 이게 바로 성정치학적 배치다. 20세기 이후 서구로부터 ‘자유연애’가 유입되면서 혼전순결이라는 성정치학이 작동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의 윤리, 인구론, 임상의학 등이 이 성정치학적 기제를 만든 주역이다. 이렇게 해서 진정, 사랑한다면 혼전순결을 지켜 주어야 하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는 표상이 만들어졌다. 자유의 이름으로 내적 검열이 더 강화된 셈이다. 그리고 그 파급효과는 대단했다. 그것은 혼전순결의 영역을 넘어 사랑이라는 행위에서 성적 욕망을 소거시켜 버리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어디 저 백 년 전의 봉구뿐인가. «가을동화», «천국의 계단» 같은 우리시대의 멜로들을 떠올려 보라. 거기서 사랑은 하나같이 ‘탈성화’되어 있다. 사랑에 빠진 남녀 주인공이 손을 잡고 입을 맞추기까지 무지막지한 시간이 걸린다. 기다리다 지쳐 쓰러질 지경이다. 키스신이 나온 이후에도 둘이 몸을 합쳤다는 건 암시조차 나오지 않는다. 한마디로, 사랑과 섹스 사이엔 만리장성이 가로놓여 있다. 대체 왜? 성욕이 개입할수록 사라은 타락해 버린다는 전제 떄문이다. 이런 ‘얼토당토않는’ 인식론적 전제의 배후세력은 크게 둘이다. 하나는 민족주의 혹은 국가경쟁력, 성욕은 곧 국가생산력의 토대인 까닭에 반드시 합법적인 부분 사이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민족과 국가의 최소단위는 ‘가족’이다. 고로, 가족 바깥에서의 성생활은 국가적 낭비다! 또 다른 하나는 기독교, 섹스는 부부의 침대 위에서, 오로지 생식을 위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민족과 국가의 최소단위는 ‘가족’이다. 고로, 가족 바깥에서의 성생활은 국가적 낭비다! 또 하나는 기독교, 섹스는 부부의 침대 위에서, 오로지 생식을 위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성스럽게! 성스러운 섹스라? 생각만 해도 우습지 않은가. 아무튼 혼전순결의 윤리적 강령은 이런 배경 위에서 만들어진 표상이다. 이 망상체계가 얼마나 많은 연애와 결혼을 파탄으로 몰아넣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잠작들 하시리라. 사랑을 저 하늘 위에 떠 있는 ‘천공의 성’처럼 만들어 버린 것도, 그리하여 늘 지상적 삶과 미끄러지게 만든 것도, 뿌리는 다 여기에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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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성욕이 곧바로 사랑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랑대방에게 신체적 합일에의 욕망을 느끼지 못한다면 사랑이라는 관점계에 진입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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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사람들은 사랑을 ‘능력’이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고 가정한다. 즉,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이ㄹ이고, 사랑할 대상 또한 나를 사랑해 줄 올바른 대상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뿐이라고 생각한다.”(«사랑의 기술»,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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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둘 사이의 아주 특별한 관계인 건 맞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소멸된다. 앞에서도 강조했다시피, 특별한 시공간적 조건이 없으면 사랑은 태어날 수 도, 이루어질 수도 없다. 그 시공간적 조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일상의 배치다. 그리고 그 일상은 수많은 관계들로 직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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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권력은 인구 전체를 촘촌하게 통제, 관리하는 일종의 생체권력이다. 인구가 곧 생산력이라는 계산하에서다. 특히 정춘의 힘과 열정은 생산의 원동력이자 토내에 해당된다. 따라서 절대로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 학교라는 제도를 통해 전면적으로 포획되어야 한다. 학교 교육이 문명의 초석이 된 건 이 떄문이다. 학교의 탄생과 더불어 모든 구성원들은 반드시(!) 학교 교육의 전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만 국가생산력에 필요한 자질을 두루 갖출 수 있다는 계산하에서다. 따라서 당연히 청젼기에는 남녀간의 결연이나 결혼 따위에 몰두해서는 안 된다. (…) 따라서 이걸 거꾸로 추론해 보면 국가경쟁력이란 다름 아닌 이 청춘의 성에너지를 흡수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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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왜 어린이날은 폐지되지 않는가? 그건 명백하게 자본의 농간이다. 자본은 상품을 소비하기 위해 가족의 사랑과 어린이의 수ㄴ수함이라는 망상을 계속 유포한다. 온갖 화려하고 가식에 찬 이미지들을 총동원하여. 거기에 ‘네 자식은 특별해’, ‘하나밖에 없는데’, ‘힘닿는 한 최대로’ 이런 식의 가족(이기)주의가 맞장구를 친다. 가족주의와 자본의 노골적 결탁! 고아나 빈민, 한부모가정의 아이들을 돌보는 역할이 있지 않느냐고 반론할지도 모르겠다. 것도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오히려 그 반대다. 어린이날 떄문에 그 아이들은 갑자기 엄청난 결핍감에 시달려야 하고, 나아가 자신들이 비정상적인 존재라는 것을 환기해야 한다. 만약 그 아이들을 정말 배려하고 싶다면 평소에 일상적으로 하면 된다. 그렇게 날 잡아서 쇼를 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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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공간은 공간일 뿐이다. 그 자체론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누가, 어떤 활동을 구성하느냐 따라 공간은 비로소 어떤 이름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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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강하고, 좀더 멋진 짝을 찾는 거야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지만, 문제는 그 척도와 방식이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있다. 척도가 다 사람마다 다르다는 뜻이다. 그래야 맞다. 사랑이란 무엇보다 ‘몸적 사건’인데, 각자 체질과 개성이 다르다면, 그 수만큼의 “안경”들이 있어야 하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 하지만, 상품이 개입하는 순간 다 똑같은 안경으로 교체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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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면, 이건 병적 징후에 해당한다. 인간 혹은 생명이라는 존재의 궤적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알다시피, 동안열풍은 늙음과 죽음에 대한 결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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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이란 20대 청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연령에 걸맞는 청춘을 매번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다.” 들뢰즈의 말이다. 이에 대한 가장 좋은 텍스트 중 하나가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 일 것이다. 그 중 한 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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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 성욕과 야망과 투쟁과 적대감과 온갖 욕망의 전쟁을 치르고나서, 자신 속으로 돌아가 자신과 산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리고 마음이 연구와 학문에서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다면, 노년보다 더 즐거운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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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듯이, 광장이 ‘광장’이 되는 건 숫자나 크기가 이나라 이질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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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과 싸울 땐 괴물과 닮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이 있다. 치열하게 싸우되 적대와 증오에 머무르지 말고 삶의 창조를 향해 나아가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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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대상의 문제가 이나라 ‘나’의 문제다. 즉, 내가 어떻게 관계를 구성하느냐가 사랑의 내용과 형식 모두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 존재의 궤적을 만든다. 존재의 흐름과 궤적, 그것을 일러 운명이라고 말한다. 내 운명의 주인공? 바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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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안의 너를 멸망시킬 태풍이 있는가?” -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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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의 한 말씀.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그 자신을 속이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남들을 속임으로써 그것의 종말을 고한다. 이게 바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로맨스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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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죽었다!”는 선언으로 유명한 이반 일리히는 현대 주부들의 노동을 ‘그림자 노동’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주부노동이란 남편의 임금노동에 예속된, 거기에 가려진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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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사랑이 도를 넘어선더나는 것이 문제인데, 도를 넘어선다는 것은 쉽게 비유하자면 상대의 개체성이라고 할까, 상대의 몫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코 대신할 수 없는, 대신 살아 줄 수 없는 그런 개체성, 그 존재 자체가 세계와 관계하는 능인의 몫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 이렇게 너와 나의 등거리가 무너지면 사랑과 자비는 실종됩니다. 당초에 선량한 뜻도 횡포해지고 말죠(농담, «애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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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 에너지 전환 작용의 필수불가결한 한 부분으로 오직 그런 과정을 통해서만 삶의 희열을 만끽할 수 있고, 에너지에 침잠된 이 우주 속에서 그 자신을 유지할 수 있으며, 또 자신의 복잡성을 증대시킬 수 있기” 떄문이다. 한마디로 생의 약동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삶의 형식이 바로 섹스인 것. 그렇기 떄문에 죽음충동과도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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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에게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떄문이다.(에피쿠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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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절대 소유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느닷없이 어떤 인연의 장이 깨어졌다면, 그 어긋남이 야기하는 번뇌는 양쪽 다 짊어지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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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에 걸리면 누구나 아프다. 하지만, 아프다고 해서 다 불행한건 아니다. 통증과 불행을 동일시하지 말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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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말하지만, 사랑은 기본적으로 어긋나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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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별로 마음도 안 가는 대상들과 아무리 놀아난다 한들, 내 몸을 진동시키는 단 한 명과는 절대 비교할 수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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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에너지를 가장 중요한 한 점에 집중해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어떤 조건이나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열심히 수행하면 어느 시점엔간 이 움직이지 않는 마음은 엄청나게 폭발적인 힘을 발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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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상대를 내 것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가치가 보다 온전한 것으로 더욱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장벽이 없이 상대를 마주한다고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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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사랑이란 원초적으로 탈주선이다. 제도와 관습 같은 사회적 장벽은 물론, 자기 안의 무수한 경계들을 넘어 전혀 다른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탈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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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당부하거니와, 절대 상품을 주고받는 식으로 사랑을 확인하지 마시라. 물론 선물은 중요하다. 하지만, 진짜 소중한 선물에는 ‘삶의 서사’가 묻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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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 토양에서 자라는 사랑의 식물은 서로를 선물하는 친구로 만들어주지만, 척박한 토양에서 자라는 사랑의 식물은 상대방을 구속하는 가시 울타리로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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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의 크기가 곧 내 존재의 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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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열정, 그것을 독일 낭만주의에선 “질풍노도(Strum und Drang)”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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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에 따르면,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스스로 창조한다.” 대상이 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대상을 창조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왜냐면? 사랑은 궁극적으로 “삶을 아름답게 창조하는” 행위이기 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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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사랑을 원한다면 혹은 지금 운좋게(!) 사랑을 하고 있다면, 무엇보다도 서사의 능력을 키우도록 하라. 다시 말하지만, 서사는 화술이 아니라, 나의 삶과 외부가 맺는 관계성의 문제다. 따라서 서사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선 대략 두 가지 전략이 필요하다. 하나는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삶의 영역을 개척하는 것. 다른 하나는 자신의 평범한 일상에 생생한 힘과 활력을 불어넣는 것. 물론 이 두가지는 함께 맞물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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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가는 물을 보면서 흐름을 보지 않고, 물만 본다. 무상과 상 사이의 간극만큼 고가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