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오디세이

미학 오디세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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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에 관한 논리적(?) 이야기. 시대는 감히 인문학의 몰락을 말한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서는 인문학적 소양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표(Matrix)와 양적으로 표현되는 수(Numbers)를 통해서이다. 난 그렇게 수학을 믿고 살아간다. 그래서 이런 책을 읽으면 당장에 닥쳐오는 답답함과 모호함에 거부감이 가장 먼저 든다. 하지만 이 책, 재미있다. 정말로 재미있다. 아름다움이 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재미있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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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아름다움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관한 책의 대부분은 서양 학자의 눈과 입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책이 번역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내용도 오래되었기 때문에 약간의 거리감도 느껴지는게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용어의 난해함에 다른 책을 읽었을 때 아주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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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이라는 우리시대 논객의 눈을 통해서 전해지는 미학에 관한 유쾌하고 즐거운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세상은 꼭 숫자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나도 세상이 숫자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걸 알고 있다. 하지만 세상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가장 좋은건 숫자라고 믿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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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렇게 목이 터져라 외치는 자연계 학생의 인문학적 소양에 관한 담론의 깊은 뜻을 분명히 알고있다. 인간에 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은 숫자는 그 어떤 재앙보다 무섭다는 것을 인간에 관한 아주 아주 작은 통찰을 가질 수 있다는 즐거움을 함께 하길 기원한다.


  1. ‘프로메터우스가 인간을 두 발로 설 수 있게 만든 건, 별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2. ‘유명한 미술사가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H. J. Gombrich, 1909 ~ 2001)에 따르면, 사물을 지각할 때 우리는 오로지 눈에만 의존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개념적 사유를 하는 인간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지(知)의 도식’을 적용하게 된다. 말하자면 시지각(視知覺) 자체가 벌써 개념적 사유라는 색안경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린이의 그림에서 벌써 우리는 시지각에 미치는 개념적 사유의 영향력을 볼 수 있다. 어린이는 결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거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크게 그리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적게 그리거나 과감하게 빼버린다. 그들은 ‘아는 대로’ 그리는 셈이다.

  3. 농경은 인간의 사유 능력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도의 추상 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4. 그 뒤 인간들은 외부세계를 파악하고 정복하기 위해 점점 더 추상적인 사유에 의존한다.

  5. 그럴수록 그들은 저 구석기인들이 가졌던 ‘벌거벗은 눈’을 잃어버렸다.

  6. 선사 시대부터 우리는 벌써 두 가지 대립되는 재현 양식을 발견 할 수 있다. 구석기 시대의 자연주의적 양식과 신석기 시대의 기하학적 양식이 그것이다.

  7. 이 두 양식의 대립은 오랫동안 미술사를 지배하게 되는데, 이 대립이 인류 최초의 문명 세계에서도 새로운 형태로 되풀이된다.

  8. 놀랍게도 주술이 실제로 효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9. 예술이 주술이고, 주술이 예술이었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구별도 없었다.

  10. 원시인들의 논리를 이용하면, 목숨을 냏고기 싫으 사제가, 자기 아들이 사실 자기랑 다를 바 없음을 사람들에게 증명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소년 살해 이야기는 아마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헤라클레스는 술에 취해 자기 아들을 찢어 죽였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디오니소스 축제도 갈갈이 찢겨 죽은 디오니소스를 추모하는 행사였다.

  11. 예술은 ‘현실’과 ‘가상’이 분리되는 순간에 탄생한다.

  12. 예술이 이렇게 주술이 ‘가상’으로 여겨지는 순간에 탄생한다. 하지만 가상으로 탄생하는 순간부터, 예술은 자신을 변명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13. 가상과 진리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대략 두 가지 노선이 있었다. 플라톤은 예술이 가상을 포기해야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가상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14. 이런 실수를 통해 비로소 우리는 다양한 사물들 속에서 공통된 요소를 뽑아 ‘개념’을 만들고, 다양한 현상들 사이에 되풀이되는 안정적 연관을 찾아내 ‘법칙’으로 확정할 수 있었다.

  15. ‘정명성의 원리’와 비슷한 것을 우리는 묘사기법이 발달하지 못한 어린이의 그림 속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다.

  16. 둘째는 ‘실제로 아름다운 것’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지.

  17. 비극의 음침한 그림자에도 이 황홀한 도취가 남아 있다.

  18. 쓰라린 파멸 뒤에 숨어 있는 이 무한한 희열의 세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비극을 바라보면서도, 그리스인들이 은밀하게 즐긴 건 바로 이 황홀한 기쁨이 아닐까?

  19. “아리스 : 플롯은 다시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집니다. 급전과 발견과 파토스죠.”

  20. “아리스 : ….. 이처럼 발견이 급전을 동반할 때, 최고의 효과를 거둘 수 있죠.”

  21. “아리스 : 맞습니다. 이때 복잡하게 얽힌 갈등을 풀기 위해 갑자기 신이 나타납니다.” “아리스 : 이 웃기는 수법을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 부릅니다.

  22. 결국 사람들이 이처럼 극장에 몰리는 건 비극을 봄으로써 운명에 대한 근원적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23. 따라서 아름다움은 ‘수적 관계가 아니라 ‘질적’ 서질에 있는 거다. 비례나 균제 자체는 미가 아니다. 미란 바로 그 속에서 빛나는 어떤 질적인 것, 굳이 말하자면 어떤 정신적인 빛이다.

  24. 예술가의 영혼은 정신세계 속의 ‘원형’을 보고 그것에 따라 창작한다. 그는 이 ‘원형(형상)’을 무정형적인 ‘질료’에 부여해 아름다운 형태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만약 예술 작품이 아름답다면, 그 아름다움의 근원은 가시적 세계에 있는 게 아니다. 그건 예술가의 내면에, 더 나아가서는 원래 정신세계에 있던 거다.

  25.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 찬 성서에서 수미일관한 신학 체계를 구축하는 건 사실 큰 문제였다.

  26. 세상에서 이성을 즐겁게 하는 건 미밖에 없고, 미에서는 형이, 형에서는 비례가, 비례에서는 수가 이성을 기쁘게 한다. 모든 아름다움은 결국 수로 귀착된다.

  27. 근원적인 아름다움을 따라 상승하는 과정은 ‘구원을 향한 영혼의 여정’이다. 하지만 인간의 힘만으론 근원적 존재에 이를 수 없다. 왜? 구원은 어디까지나 신의 은총이니까.

  28. 오히려 배우는 배역상 가장 훌륭하게 속일 때 가장 참된다. 신을 변호했던 것만큼이나 훌륭한 논리로, 그는 이젠 예술을 변호한다.

  29. 사실 묘사에서 물질세계를 희생했지만 인간의 영혼 깊숙이 파고드는 힘에선 중세 예술을 따라갈 수 있는 건 없다.

  30. 중세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 고딕이라는 위대한 양식을 낳는다.

  31. 그래서 당시의 조형예술은’마음이 가난한 자의 성서’라 불렀는데, 여기서 ‘마음이 가난한 자’란 아마 ‘못 배우고 무식한 자’를 가리키는 모양이다.

  32. 중세회화는 눈에 보이는 외부세계의 재현을 포기하고 정신세게의 아름다움을 담으려 했다.

  33. 이제 교회는 물질세계를 소극적으로 무시하지 않고, 그걸 신의 섭리를 실현하는 장으로 바라본다. 이 세상은 신이 창조한 거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사물 속엔 창조의 질서가 들어있다. 따라서 신이 지으신 세계를 묘사하는 건, 곧 창조의 아름다움을 파악하는 걸 의미한다. 고딕 자연주의는 이런 사회적, 철학적 분위기에서 나왔다.

  34. 플라톤 : 완전한 삼각형은 논리적으로 ‘눈’으로 볼 수 없는 거야. 오직 ‘마음의 눈’에서만 보일 뿐이지.

  35. 그가 보기에 회화는 심지어 과학보다도 뛰어나다. 왜? 과학은 사물들의 ‘양적’ 관계만을 인식하지만, 회화는 ‘질적’ 관계까지 인식하니까. 그러므로 회화야말로 학문의 여왕이다.

  36. 그에게 창의력이란 ‘재현이 규칙을 발견하는 능력’이었으니까.

  37. 17세기 예술을 바로크 예술이라고 부른다.

  38. 이제 부르주아지는 절대왕정을 타도하고 자신이 권력을 잡기를 꿈꾼다. 이 부르주아 드림이 바로 ‘계몽주의’다. 그들은 진리의 근원을 인습이나 권위가 아닌 인간의 ‘이성’에서 찾았고, 이성이 인간에게 무한한 행복을 가져다주리라 굳게 믿었다. 얼마나 굳게 믿었냐하면, 세려된 프랑스인들이 자기 나라 왕의 목을 벨 정도였다.

  39. 미학도 실은 계몽주의 산물이다.

  40. 원래 ‘명확’하다는 건 어떤 개념이 외적으로 다른 개념과 뚜렷이 구별된다는 뜻이며, ‘뚜렷’하다는 건 그 개념의 내용이 내적으로 명확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명확함을 위해선 개념을 분류하고, 뚜렷함을 위해선 개념을 정의한다.

  41. 아리스토텔레스는 운율을 만드는 기술은 가르칠 수 있어도, 은유를 만드는 기술은 가르칠 수 없다고 했다.

  42. 과연 수학적 비례만으로 미를 창조할 수 있을까? 그리스인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스 건축가들은 의도적으로 엄격한 수학적 비례에서 벗어나 일탈을 즐겼다.


미학 오디세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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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예술의 시작은 알고보면 아주 단순한 형태에서 출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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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의 고대, 중세, 근대를 거쳐서 2권은 현대예술의 세계로 접어들게 된다. 앞 글자에 ‘현대’란 단어가 붙으면 매우 복잡하고, 어지럽다. 뭔가 체계화 되어있는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그 작품이 무엇을 나에게 말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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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2>를 통해서 내가 얼마나 좁게 생각하고, 얼마나 무관심하게 살았는가 또 다시 생각해 본다. 바쁘다는 핑게로 이렇게 소중한 소통방법을 등한시 하고 살았구나 싶었다. 미학에 관련된 책을 읽으면서 내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사실은 어찌보면 참 부질없을 만큼 헛된 지식이란 걸 알게 되었다. 결국은 사람이 중요한 것이다. 현대 미술의 핵심은 그 수많은 사조가 아니라 사람이란걸 알게되었다.


  1. 하지만 고전주의는 ‘사유’의 그림이고, 인상주의는 어디까지나 ‘보는’ 그림이다. 고전주의의 투시원근법은 논리적 ‘판단’의 산물이지만, 인상주의의 빛의 효과는 ‘감각’의 산물이다.

  2. 르네상스인들이 ‘디자인’이라고 불렀던 것, 말하자면 예술가의 머리속에 떠오른 구상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예술 작품이다.

  3. 신의 창조는 그야말로 크레아티오 엑스 니힐로(creatio ex nihilo), 즉 무(無)로부터의 창조다. 신은 모든 걸 자기 속에서 끄집어내서 창조하며, 창조하는 데에 자기 외에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의 그림자인 인간은 자기 창조를 할 수 없다. 그는 미로 존재하는 질료에 미리 존재하는 형(形)을 부여할 뿐이다. 그는 다만 발견하고 실현할 뿐이다.

  4. 그러므로 지각하고 관조하는 활동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예술 작품은 ‘작품’으로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5. 아무리 많은 형용사를 동원한다 해도 문학 작품에선 여전히 비규정되지 않은 부분이 남기 마련이다. 이 빈 곳을 ‘비규정 장소(Unbestimmtheitsstellen)’라 하는데, 이곳은 당신 스스로 알아서 채워넣어야 한다.

  6. 구체화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작품 속의 빈 곳을 모든 사람이 똑같이 채우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7. 물론 선입관이 항상 옳으란 법은 없다. 하지만 머리속에서 선입관을 지운다면, 그 순간 당신의 머리는 백자가 되고 만다. 텅 빈 머리로는 ‘객관적으로’는 고사하고, 도대체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선입관이야말로 오히려 이해의 전제 조건이다.

  8. 어떻게 보면 과거와 현재의 지평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간극이야 말로 적극적이며, 생산적인 역할을 한다. 왜? 바로 이 간극이 우리로 하여금 시대마다 작품을 새로이 해석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9. 그들이 공포와 연민의 눈으로 별로 유쾌하지 않은 얘기를 바라본 건 바로 이러한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10. 고전주의적 예술관은 수용자에게서 작품을 주체적으로 해석할 권리르 빼았는다. 수용자는 작품이 던져주는 의미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하지만 텍스트를 작품으로 만드는 건 독자다. 무슨 권리로 수용자에게서 작품 해석의 작유를 빼았는단 말인가.

  11.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다다이스트들은 문명을 조롱하고 전통을 파괴하고 사회적으로 존경받아온 모든 가치를 전복하려고 했다. 그 가치들 속엔 물론 예술도 포함된다. 그들은 예술까지도 조롱했고, 예술을 ‘아무것도 아닌 것’, ‘애들 장난감(다다)’으로 만들어버리려했다. 다다가 종종 ‘반(反) 예술적’이라 불리는 건 이 때문이다.

  12. 플라톤 : 이상하지 않은가? 모든 낱말은 이렇게 사전 밖으로 빠져 나올 수 없는데, 그게 어떻게 바깥의 ‘시물’을 가리킬 수 있는 걸까?

  13. 왜, 겉옷을 벗기면 하얀 속옷이 나오고, 그걸 벗기면 겁은 게 나오고, 그 가운데에 구멍이….., 레코드를 가리키는 데 이렇게 힘이 든다.

  14. 이 불확실성을 ‘엔트로피’라 부른다.

  15. 하지만 무조건 복잡하다고 좋은 작품은 아니다. 예측 불가능성이 너무 크면 정보 쇼크를 주게 된다.

  16. 쉽게 말하면 아름다움은 질서 또는 예측 가능성(네그엔트로피)과 예측 불가능성(엔트로피)의 함수 관계에 있다는 얘기다. 정보 이론에선 미를 ‘엔트로피와 네그엔트로피의 최적의(optimal) 관계’로 규정한다.

  17. 결국 고전주의 예술은 의미 정보를 추구한 반면, 현대 예술은 의미 정보를 단순화하는 가운데 미적 정보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8. 컴퓨터에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컴퓨터를 단지 창작의 도구로만 이용하는 거다. 가령 위의 예에서 컴퓨터는 추리소설의 가능한 경우를 찾아내기 위한 도구일 뿐, 소설을 구성하는 작업은 당신이 직접 해야만 한다.

  19. 사실 예술의 법칙을 찾아내 알고리듬화(化)하려는 시도는, 천재의 비밀을 찾아 모차르트의 작품을 샅샅이 해부했던 살리에리의 절망적인 노력을 연상케 한다.

  20. 현대 예술은 열려 있다 .이런 특징을 에코는 ‘개방성’이라고 부른다.

Written on May 5,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