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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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검푸른 그림자가, 바람 따라, 성에 낀 유리창에 흰 살을 부드럽고 난폭하게 쓰다듬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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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적요 시인이 남긴 마지막 문장에 뭐랄까, 차가운 폭력성이 담겨 있었다. 관능은 시간을 이기는 칼이며,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누군가의 죽음을 부른다는 것, 신생의 폭설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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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라면, 목이라도 베이고 싶은, 저돌적인 욕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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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가 말한바 ‘낙타의 시기’가 그에겐 영원했고, 따라서 자기반역을 통해 세계를 독자적으로 이해하는 ‘사자의 시기’는 그에게 도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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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찾아올 때 그는 이미 출구 없는 미로에 갇힌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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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네게 연필은 연필이지만 마음 놓고 공부할 환경을 살지 못했던 내게 연필은 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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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은교, 네게 첫 편지를 쓴다. 지금은 부치지 않을 편지를. 그래도 편지, 하고 발음하고 나니까 사탕을 물었을 때처럼 혀끝이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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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되고 애인이 되는 데 나이는 본원적으로 아무 장애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나의 열입곱과 너의 열입곱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면 그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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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참한 기억의 편차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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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는 자연이라고 나는 믿었다. 그것은 본래 자연이 만든 순환의 한 과정에 불과하다. 특히 남자들에게 섹스는 환상이 아니라 현실 문제이다. 여자들이 종종 섹스를 통해 환상에 근접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남자들은 섹스를 통해 환상을 현실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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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은교를 품는다고 해도, 젊은 그애의 몸속에 내 몸을 파죽지세 박아넣는다 해도, 그것으로 내가 무엇을 이루겠는가. 그애는 ‘구멍’을 내 줄 뿐이고 나는 어두운 ‘구멍’을 잠시 얻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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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시대의 환경을 반영하면서 쌓이는 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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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소설이 그의 경우, 미완으로 서랍 속에 수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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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요 시인이 본 경이로운 아름다움이란 은교로부터 나오는 특별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단지 젊음이 내쏘는 광채였던 것이다. 소녀는 ‘빛’이고, 시인은 늙었으니 ‘그림자’였다. 단지 그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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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 있어 연애는 영혼으로부터 감각으로 옮겨가는지 모르지만, 남자에게 연애는 감각으로부터 영혼으로 옮겨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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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은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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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에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것은 혈연에 따른 의무와 권리로 사람의 관계를 묶어두려는 일종의 정치적인 속임수라고 까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