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클리드의 창 - 기하학 이야기

1.

동시성 개념이 무너지면 거리와 시간이 상대화된다.

2.

기학에 관심이 있다면, 충분히 재미있는 책.

3.

물리와 수학이 어떻게 연관성을 가지는가에 대해서 이해하기 쉽게 구성되어 있다.

4.

통찰력과 자료수집 능력에 경의를 표한다.


  1.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본»이 이룬 가장 중요한 업적은 혁신적인 논리적 방법이다. 첫째, 명시적인 정의를 만들어 용어들을 분명히 함으로써 사람들이 모든 단어와 기호를 서로 동일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다음으로, 공리 혹은 전제( 이 두 용어는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다)를 명시적으로 밝힘으로써 진술되지 않은 이해나 가정이 사용되지 않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공리와 증명된 정리에 허용된 노리적 규칙만을 적용하여 귀결을 도출한다.

  2. 종이 위에 직선을 그리고 직선 외부에 점 하나를 찍어보라. 그 점을 통과하는 평행선을 그을 수 없는 경우가 있을까? 하나 이상의 평행선을 그릴 수 있을까? 평행선 공리는 우리의 세계를 기술하는 것일까? 평행성 공리릉 위반하는 기하학이 수학적으로 일관적일 수 있을까? 마지막 두 질문은 결국 이성적 사고의 혁명을 가져왔다ㅏ. 앞의 질문은 우주관을, 뒤의 질문은 수학의 의미와 본성에 관한 우리의 앎을 혁명적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2,000여 년의 세월 동안 유클리드의 제 5공리가 표현한 “사실” – 단 하나의 평행선이 있다는 사실 – 만큼 보편적으로 인정된 것은 인류 학문의 어느 분야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3. 위치 이론의 참된 위력은, 서로 다른 위치와 궤적과 도형을 서로 연관 시키고 등식을 적용하여 조작하는 능력에 있다. – 즉 기하학과 대수학을 결합하는 능력에 있다.

  4. 샤를마뉴가 장려한 교회 학교들은, 비록 도자적인 노의가 없는 요새이기는 했지만, 마치 야생화처럼 퍼져나가 마침내 유럽의 대학들로 바뀌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에 따르면 최초의 대학은 1088년에 세워진 볼로냐 대학이다. 결국 유럽의 지성적인 세력으로 다시 등장하게 하고, 특히 프랑스를 수학의 중심이 되게 한 것이 바로 이 대학들이다. 기원후 1000년을 전후해서 암흑시대는 끝난다. 우리가 소위 중세라고 부르는 시대는 그 후로도 500년을 더 지속하지만 말이다.

  5. 중세 후기의 주된 자연철학적 흐름은 새로운 대학들, 특히 옥스퍼드와 파리에 중심을 둔 스콜라 철학이었다. 정신적인 대립을 막고자 했던 스콜라 철학자들의 주된 노력은 그들의 물리학적 이론과 종료를 화해시키는데에 있었다. 그들의 철학의 중심 물음은 우주의 본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성서에 주어진 지식이 이성을 통해서도 도출되거나 설명될 수 있는가 하는 “메타-질문”이었다.

  6. 그리스 학문의 소실됨으로써 발생한 극소수의 이득 중 하나는 무리에 대한 피타고라스의 입장이 빛바랜 것이다. 무리수 이론은 칸토어와 그의 동시대인인 데데킨트의 연구가 이루어지 19세기 후반까지 탄탄한 기반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중세에서부터 그때가지의 기간 동안 대부분의 수학자와 과학자는 무리수의 존재가 의심된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어쨌든 무리수를 사용했다. 아마도 정확한 해답을 얻는 기쁨이, 존재하지 않는 수를 취급하는 데에서 오는 거리낌을 능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7. 한 측면에서 보면 그래프는, 한 양이 변할 때 다른 양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나타내는 함수의 그림이다.

  8.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데카르트의 거리 산출 공식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결정적으로 의존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거리를 좌표의 함수로 보는 것은 보편적으로 타당한 생각으로서, 훗날 유클리드 기하학 및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의 성질을 이해하는 데에 열쇠가 되었다.

  9. 유클리드를 반박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도약이었는지를 이해하려면, 그가 묘사한 공간이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렸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ㅏ. 자신의 시대인 고대에 이미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본»은 고전이었다. 유클리드는 수학의 본성을 정의한 것만이 아니다. 그의 책은 교육과 자연철학에서 논리적 사고의 모범으로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책은 중세 지성의 부활의 열쇠가 된 작품이다. 그의 책은 1454년 인쇄술이 발명된 후 가장 먼저 인쇄된 책들 중 하나이며, 1533년에서 18세기까지 수많은 그리스의 작품들 중 원문 인쇄본이 있었던 유일한 작품이다. 19세기까지 모든 건축가들, 모든 회화의 구도, 모든 과학적 이론과 방정식이 예외없이 유클리드적이었다. «기하학 원본»은 이 엄청난 위엄과 이룰 자격이 있는 작품이다.

  10. 수학자들은 똑같은 실수를 두 번 저지르지 않았다. 그들은 셀 수 없도 없이 여러 번 똑같은 실수를 저지렀다. // 평행선 공리의 증명에 관한 언급에서…

  11. 가우스는 곧 재혼하여 세 명의 아이를 더 낳았다. 그러나 요한나의 죽음 이후 삶은 그에게 더 이상 즐거움을 주지 못했던 것 같다. 보요이에게 그는 이런 편지를 썼다: “내가 나의 삶에서 세계가 추앙하는 많은 것을 얻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믿어다오, 나의 친구야, 나의 삶을 붉은 리본처럼 수놓은 것은 비극임을.” 카를의 손자 하나가 1927년에, 그 손자 역시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 할아버지의 유품 중에서 눈물로 얼룩진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그 쪽지에 할아버지가 쓴 글은 다음과 같다. : “외로움 속에서 나는 나를 둘러싼 이곳의 행복한 사람들 주위를 서성거린다. 잠깐 동안 그들 덕에 나의 슬픔은 잊지만, 슬픔은 곧 두배가 되어 돌아온다…. 맑은 하늘조차도 나를 더욱 슬프게 한다..”

  12. 오늘날의 수학자들과 물리학자들은 철학자가 그들의 이론을 어떻게 생각할지에 관해서 거의 염려하지 않는다. 유명한 미국 물리학자 파인먼은 철학게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매우 간단명료하게 두 개의 철자만을 사용해서 대답했다. 그는 철자 “b”와, 일반적으로 복수형을 만들 때 쓰는 철자를 썼다.(“bs”, 즉 2류들/역주)

  13. 리만이 미분기하학에서 이룬 업적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 주춧돌이 되었다. 만일 리만이 시험간연의 주제 목록에 기하학을 넣는 경솔함을 범하지 않았다면, 또는 가우스가 그 주레르 선택하는 황담함을 연출하지 않았다면, 물리학 혁명을 위해서 아인슈타인에게 필요했던 수학적 도구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물리학의 대격동이 일어나기 이전에 이미 타원 공간에 관한 리만의 연구는 수학의 세게에서 혁명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평행선 공리 이외의 공리들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 수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밧줄이 조금씩 닮아 가닥들이 끊어져가는 형국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밧줄이 끊어졌다. 그제서야 수학자들은 그 밧줄에 매달려 있는 것이 기하학뿐만 아니라 수학 전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14. 어느날 갑자기 수학적 공간은 추상적인 논리적 구조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물리적 공간의 성질은 별개의 탐구 주제가 되었다. 그것은 수학이 아닌 물리학의 문제가 되었다.

  15. 만일 시간과 공간에 대한 뉴터의 사상이 옮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일이 불가능함을 쉽게 알 수 있다. 첫째, 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 다가가는 속도에는 한계가 있을 수 없다. (…) 둘째, 빛의 속도가 일정할 수 없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빛은 서로 다른 관찰자에게 서로 다른 속도로 다가가야 한다. 만일 당신이 빛을 향해서 달린다면, 빛은 당신이 빛으로부터 달아날 때보다 더 빨리 당신에게 다가올 것이다.

  16. 이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마치 보편적인 물리적 법칙인 듯이 과감하게 양자개념을 사용했다ㅏ. 당시에는 광자가 다만 복사현상과 물질의 상호작용을 설명하기 위한 불분명한 개념적 구성물에 불과했다. 아무도 이 문제를 지적하지 않았던 것은, 당시 이 분야가 어차피 의문부호로 가득 찬 분야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처럼 양자를 복사광선에 적용하는 만용을 부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할 경우 잘 이해되고 잘 검증된 맥스웰 이론에 반기를 들게 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다른 혁명적 작업과 마찬가지로 이 논문도 처음에는 시뢰를 얻지 못했다. 로렌츠와 심지어 플랑크 자신도 아인슈타인의 생각에 반대했다. 오늘날 우리는 아인슈타인의 논문이 플랑크의 양자 발견에 버금가는 중요성으로 양자 이론의 역사를 장식하는 이정표를 이룬다고 평가한다. 이 논문으로 아인슈타인은 1921년의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1세기 후 아인슈타인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다른 두 편의 논문이다. 그 논문을 통해서, 가우스와 리만이 간으성을 증명한 새롭고 신비한 휘어진 공간의 우주로 과학자들을 이끈 11년 동안의 대항해가 시작되었다.

Written on January 1,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