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의 역사 (상)

수학은 추론의 형식이지 디오판투스의 대수와 같은 비법의 모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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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기하학의 발전사라고 부제를 달아도 충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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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인도의 수학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서구 중심적’ 사고를 했는지 알 수 있다.


  1. 손가락으로 세거나 5와 10을 기본수로 하여 세는 습관은 역사적으로는 2와 3을 기본수로 하여 헤아리는 방법보다 늦게 생겼는데도, 거의 예외 없이 2진법, 3진법은 10진법으로 대체되었다.

  2. 문화 수준과 특징을 고려하면서 인류의 과거를 연대와 시대로 나누는 것이 통례이다. 그와 같은 구분이 쓸모 있긴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편의를 위해 임의로 짠 단순한 틀에 지나지 않고, 이것이 만들어 내는 시대 구분이 금을 긋듯이 그어지는 것이 아님을 늘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3. […] 20세기의 첫 사반세기가 끝나 가는 무렵에서야 메소포타미아가 수학에 이비자한 것에 괗나 연구가 인정받게 되었다.

  4. […] 어쩄든 이집트의 수학은 상당히 다행스런 출발을 하였지만 그 뒤 약 2,000 년 동안은 정체했었다.

  5. 그리스 이전의 수학에 많은 결함이 있었음은 아주 분명하다. 남아 있는 파피루스와 점토판에는 특별한 경우를 다룬 문제만 실려 있고 일반적인 공식화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이들 초기의 문명이 수학의 핵심이 되는 통일 원리를 정말로 이해하고 있었는지 의문스럽다.

  6. 규칙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는 것보다 심각한 일은 정확한 값과 어림셈한 값 사이에 확실한 구별이 없다는 것이다.

  7. 또 그리스 이전의 문화는 수학 자체에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거나 전혀 갖지 않았고 오로지 실용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었다고 오해받기도 한다. 여기서도 명백한 증거보다는 판단의 문제가 얽혀 있다. 그 당시도 지금처럼 인류의 대다수는 생존을 위한 절박한 문제에 매달려었다.

  8. 탈레스를 최초의 수학자라고 하게 된 것은 세 사람의 주석자의 손을 거친 프로클로스의 이 인용문에 따르는 바가 크다. 프로클로스는 뒤에 다시 에우데무스에 의존하면서 ‘주석’ 가운데 앞서 기술한 네 가지의 정리를 탈레스의 업적으로 돌리고 있다.

  9. 오늘날의 그리스인이 기하학을 논리적 구조 위에 세운 것을 널리 인정한다. 그러나 이 중요한 한 걸음이 탈레스가 내디딘 것인가 아니면 그 뒤의 사람이 내디딘 것인가라는 커다란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10. […] 피타고라스 학파가 수학에 새로운 중점을 주었고, 피타고라스 학파의 수학은 일상 생활의 일보다도 ‘지혜에 대한 사랑’과 더욱 밀접하였다.

  11. 제논의 논의는 그리스 수학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그 영향은 이 제논의 논증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 약분할 수 없는 양의 발견이 가져다 준 영향과 맞먹을 정도이다. […] ‘원론’에서는 정수조차도 선분으로 나타내고 있다. 수의 영역은 이전의 이산적 성질을 계속 유지했지만, 연속량의 세계가 되면 수와 별개로 기하학적 방법으로 다루어야 했다.

  12. 정의에 이이서 유클리드는 공준 다섯 개와 공통개념 다섯 개를 들고 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리와 공준을 확실히 구별하였다. […] 전자는 자명한 명제, […] 후자는 학습자의 동의를 전제로 하지 않아도 되는 사항이었다.

  13. […] 바꿔 말하면 1,800년쯤 뒤의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가능하게 한 것이 아폴로니우스의 순수 수학이었음은 분명하다.

  14. […] 고대 로마는 오랜 역사를 통해 과학과 철학에 이바지한 바가 거의 없었으며, 수학에 대해서는 한층 더했다.

  15. 알콰리즈미의 산술을 통해서 알콰리즈미라는 이름은 흔한 영어 낱말이 되었다. 가장 유명한 저서의 제목 ‘복원과 축소의 과학’에서 더욱 잘 알려진 일상어를 제공했다.

  16. 비에트가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대수학이었는데 여기서 그는 근대적 사고에 가장 근접했다. 수학은 추론의 형식이지 디오판투스의 대수와 같은 비법의 모음이 아니다.

Written on January 17,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