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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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가… 생각이 났다. 이 작품 어디서 ‘읽어’ 본 적 있는데? 읽었을 때 너무 재미있어서 하루만에 후딱 읽었던 작품이였다. 내 안의 욕망이 꿈틀거리고, 세상에 그 욕망을 표출 할 수 없었던 그 시절, 욕망의 꿈틀거림과 순수해지고 싶은 가녀린 감수성 그리고 살아야 한다는 체념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던 나의 20대 중반에 읽었던 이 작품은 그렇게 잊혀졌다.


  1. 볼품없는 그녀의 가슴에 노브라란 사실 어울리지도 않았다. 차라리 두툼한 패드를 넣은 브래지어를 하고 다녔다면 친구들에게 보일 내 체면이 섰을 것이다.

  2. 결혼한 뒤 아내는 집에서 아예 브래지어를 벗고 지냈다.

  3.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4. 있었다면 다시 환멸을 맛보았다는 것, 결국은 자신이 그것을 실현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는 것이었다. 그가 꿈꾸는 것을, 대체 어떻게 다른 누군가가 대신 끄집어내줄 수 있겠는가.

  5.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6. “그럼 왜 햇빛 아래서 가슴을 드러냈던 거지, 라고 그는 묻지 못했다. 마치 광합성을 하는 돌연변이체의 동물처럼. 그것도 꿈 때문이었나?

  7. “내 몸에 꽃을 그리면, 그떈 받아주겠어?”

  8. 죽었으면 좋겠어. 죽었으면 좋겠어. 그럼 죽어 죽어버려.

  9. P는 매우 공을 들여, 천천히 그의 몸에 붓질을 했다. 붓은 차가웠고, 그 감촉은 간지러우면서도 저릿저릿한, 집요하고 효과적인 애무와 같은 것이었다.

  10. 영원히, 이 모든 것이 영원히… 라고 그가 견딜 수 없는 만족감으로 몸을 떨었을 때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11. 마지막 수분간의 섹스는 그녀의 이를 부딪치게 했고, 거칠고 새된 비명을 지르게 했고, “그만…“이라는 헐떡임을 뱉게 했으며, 다시 눈물을 흘리게 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12. “그러니까… 이제 알겠어요. 그게 내 뱃속 얼굴이라는 걸,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얼굴이라는 걸.”

  13.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녀가 간절히 쉬게 해주고 싶었던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느닞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14. 그녀는 계속해서 살아갔다. 등뒤에 끈질긴 추문을 매단 채 가게를 꾸려나갔다.

  15. 난 몰랐거든,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게 됐어. 모두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구. 봐, 저거 봐, 놀랍지 않아?

  16. 어떻게 내가 알게 됐는지 알아? 꿈에 말이야, 내가 물구나무서 있었는데… 내 몸에서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

  17. 나, 내장이 다 퇴화됐다고 그러지, 그치.

  18. ….언니도 똑같구나

  19. 왜, 죽으면 안되는 거야.

  20. 나는 당신을 몰라.

  21. 용서하고 용서받을 필요조차 없어. 난 당신을 모르니까.

  22. 비에 녹아서… 전부 다 녹아서… 땅속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어. 다시 거꾸로 돋아나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거든.

  23. 자신이 오래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 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24.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웃음의 끝에 그녀는 생각한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 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 때로는 소리내어 웃기까지 한다. 아마 그도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 잊혀졌던 연민이 마치 졸음처럼 쓸쓸히 불러일으켜지기도 한다.

  25. 그것은 결코 따뜻한 말이 아니었다. 위안을 주며 그녀를 일으키는 말도 아니었따. 오히려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이었따.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받아줄 나무를 찾아낼 수 없었다.

Written on January 1,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