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그들은 디지털 리더가 되었다.

  1. […] 그 무렵 테니슨이 쓴 시 중에서 이런 구절이 있다. 1분마다 한 사람이 죽고 1문마다 한 사람이 태어난다. 배비지는 이 시를 물고 늘어졌다. “이런 계산이면 세계 인구는 영원히 군형 상태를 이루지, 그러나 세계 인구가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므로 당신의 뛰어난 시를 다음 출판 때는 이렇게 바로잡는 게 어떻가?” 모든 순간에 한 사람이 죽고 1과 6분의 1사람이 태어난다. “정확히 숫자는 1.167명인 것을 덧붙여두지만, 음률의 법칙에 따라 양보할 일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2. […] “바다의 나라 영국에 필요한 항해술과 대포틔 탄도 계산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고, 정부는 상당한 액수의 지원금을 보냈다. 이는 정부가 개인의 연구를 지원한 첫 번째 사례이다.

  3. 배비지가 세상을 뜬 뒤인 1891년, 영국 과학자들은 배비지의 설계대로 기계를 만들었다. 이 계산기는 동시에 소수점 이하 31자리까지 정확하게 계산해 내면서 배비지의 천재성을 증명해 보였다. 초창기에 컴퓨터를 만들었던 사람 중 하나인 하워드 에이킨은 “찰스 배비지가 75년 뒤에만 살았더라면 이 19세기 발명가는 자신의 생각을 현실화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4. ABC는 특정 계산만 처리했지만 Z3는 여러 계산에 두루 이용할 수 있었으며, ABC는 관리자들이 단추를 누르거나 손잡이를 돌려서 자동으로 직동했다. ‘최초의 프로그램 제어 컴퓨터’라는 타이틀이 붙은 것은 이 떄문이다. 개발비가 6,500 달러에 불과한데도 사칙연산과 루트 등 복잡한 계산을 훌륭하게 해냈고, 하워드 에이키늬 마크 I 보다도 빨라서 3초에서 5초에 한 번씩 곱셈을 했다.

  5. 당시 미 해군연구소에서 컴퓨터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일하던 하워드 에이킨은 프로그램 언어인 ‘코볼(COBOL)’의 개발자이나 훗날 미 해군 최초의 여성 해군 제독이 된 그레이스 머리 호퍼(Grace Murray Hopper)에게 마크 I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어마어마한 기계 덩어리가 무엇을 하는지 몰랐지만 이 계기로 탄젠트 보간법의 계수를 구하는 일을 맡았다. 1983년 그녀는 “오늘날 마크 I을 본 사람은 그것이 컴퓨터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그 기계가 계산을 했다는 사실도 믿기 힘들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6. 1947년 1948년에는 <전자계산기의 논리="" 설계와="" 예비적="" 토론="">의 속편에 해당하는 <<전자계산기를 위한="" 문제의="" 계획과="" 코딩="">>이라는 책 세 권을 발행했다. 여기서는 컴퓨터 이론의 기본인 플로우 차트(flow chart)가 처음 등장했고, 프로그래밍의 정의의와 방법도 자세히 소개되었다. 자신의 책에 대해 노이만은 이렇게 말했다. "프로그래밍은 번역과 같은 정적인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의도하는 바가 자동으로 전개되는 것을 제어하기 위한 동저인 기초를 부여하는 기술이다."

  7. […] 2차 세계대전 동안 노이만과 동동 연구를 했던 제이콥 브로노프스키는 “게임 이론이 체스 같은 게임에 대한 것”이냐고 물었다. 그때 노이만은 이렇게 답했다. “ 체스는 게임이 아니라 잘 정의된 계산이다. 이론적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올바른 답을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의 삶은 그렇지 않다. 세상은 허풍떨기, 속임수로 채워졌다. 그것이 내 이론에서 게임이 뜻하는 주제다.”

  8.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금메달을 딴 바로 그해, 저 너머 영국의 앨런 튜링은 “어떤 계산이나 논리적인 조작도 알고리즘만으로 자동화할 수 있다.”면서 컴퓨터 이론을 이끌어냈다.

  9. 그의 독선적인 성격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지만 과학에 대한 열정만큼은 지독히도 순수했다. 1969년 8월, 콜로라도 대학에서의 연설은 쇼클리의 철학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사고(thinking)에 대해 깊이 생각한 뒤 얻은 한 가지 중요한 결론은 ‘창조적 능력’이 실패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기 위한 과정에서는 방황과 좌절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좌절에 도달하는 과정과 행동이 창조적 능력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그런 행동이 있어야 눈앞에 맞닥뜨린 혼동 상황을 해석하는 열쇠, 결국은 개념을 알게 된다. 창조적인 실패는 ‘사고’라는 도구를 이용해 결국은 본질에 가깝게 다가선다. 그래서 사고에 대해 계속 생각하면서 불가피한 인간의 한계를 참고 견딜 수 있고 실패를 통해 지적 능력을 축적해 나간다.”

  10. “미래를 예측하는 최선의 방법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2004년 10월, 컴퓨터공학협회(ACM)가 주는 ‘2003년 튜링 상’을 수상한 앨런 케이(Alan Kay)가 남긴 말이다. 컴퓨터 분야의 노벨상을 거머쥔 앨런 케이는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알토(Alto)’를 만들어 ‘PC의 아버지’로 통한다. 그는 이 과정에서 마우스를 개발하고 하이퍼링크 개념을 창안한 또 한 명의 천재 ‘더글라스 엥겔바트(Douglas Engelbart)’를 만났다.

  11. […] 그 무렵 1965년 노르웨이 출신의 크리스텐 니가드와 올레-요한 달이 만든 ‘시뮬라’라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접한 앨런은 시뮬라가 스케치패드와 같은 구조의 프로그램을 짜기에 알맞다고 생각했다. […] 이후 ‘객체’라는 작은 단위로 프로그래밍을 처리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OOP)’이다. […] 프로그래밍 세계에 새 바람을 불어넣은 OOP는 훗날 ‘스몰토크(smalltalk)’로 대표되는 새로운 기법으로 자리를 잡았다.

  12. 박사학위를 받은 뒤 앨런 케이는 스탠포드 대학 인공지능연구소에서 새로운 컴퓨터 언어를 설계했다. 그는 연구실에서 2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아이들도 쉽게 쓸 수 있는, 책 크기의 컴퓨터를 만들기 위해 키디콤(Kiddiekomp)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때 컴퓨터에서 돌아가는 객체 지향 언어를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해 1972년 ‘스몰토크’를 완성했다. […] 1980년대 중반 C++ 등의 객체 지향 언어가 발표되면서 개발자들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13. 앨런 케이는 “전문가만이 컴퓨터를 쓰는 시대는 지났다”면서 “연필과 종이를 쓰는 것처럼 컴퓨터를 자유롭게 이용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확신했다. 이를 위한 컴퓨터를 구상하면서 이름을 ‘다이나북(Dynabook)’이라고 지었다. 평평한 화면과 스타일러스 펜, 무선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다니나북에 대해 엘런은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네티워크로 연결되어 있어서 테스트, 이미지, 애니메이션, 동영상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개인용 컴퓨터의 모델”이라고 털어놯다.

  14. ‘인터넷 아버지’로 존경받는 빈톤 서프(Vinton Cerf)가 여러 종류의 네트워크를 연결하기 위해 만든 TCP/IP가 없었다면 인터넷은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Written on April 12, 2012